인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자부했지만, 이건 몰랐다 [인천으로 가자]
[이상구 기자]
"바람이 분다. 바람이 불어 연평바다에 어허얼사 돈바람 분다." 익히 알려진 '군밤타령'의 첫머리다. 군밤을 주제로 한 노랜데 시작은 뜬금없이 '연평도 바람'이다. 군밤과 그것이 무슨 상관이람.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지만 연평의 바람이 '돈바람'이란 대목에서 작사자의 의도가 읽힌다.
▲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 임경업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장군은 명나라로 행하던 중 연평에 들러 주민들에게 가시나무 걸치기 비법을 전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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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신화는 조선시대 명장 임경업으로부터 시작한다. 당시 조선은 두 차례의 청나라 침공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형편없는 약소국이었다. 특히 1636년 발발한 병자호란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왕자까지 볼모로 끌려가는 등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배를 감내해야 했다. 당시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였던 임경업은 두 왕자를 다시 구출해내려면 그때까지도 중원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명나라를 이용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른다.
▲ 안목어장 물살이 빠르고 거칠어 임경업 장군이 전파한 어로비법을 쓰기 적당했다. 처음 나무가지 끝에 걸린 조기들의 모습에 마을 사람들은 환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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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나무 어로법 가시나무를 잘라 썰물 때 뭍은 향하게 꽂아두면 된다. 썰물에 쓸려나가던 조기들이 그 가지 끝에 꿰는 방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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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개의 나뭇가지 끝마다 은회색 조기들이 걸려 푸덕거리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이때부터 연평도는 조기의 산지로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해마다 음력 4월이면 조기 파시(波市)가 섰고 많으면 어선만 1천여 척이 넘을 때도 흔했다.
조기의 추억은 역설적이게도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한도 끝도 없는 인간의 탐욕이 점차 조기의 씨를 말리고 바다 생태계까지 해친 거다. 일제가 들여온 안강망은 결정타였다. 1934년 6월 발생한 재해참사는 그에 대한 명백한 경고였다. 갑작스런 비바람을 피해 300여 척의 배가 연평항으로 귀항해 정박하였으나 세찬 바람과 파도가 항구를 덮쳤다. 그 날 사고로 323척의 배가 파괴되고 20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 연평도 평화공원 제1, 2차 연평해전 당시 순국한 25용사를 기리는 곳이다. 연평은 다양한 추모의 방식이 혼재하는 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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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풍바위 연평도 병풍바위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어부 위령탑과 등대와 순국장병 전물탑이 함께 서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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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세의 후세들은 그 옆 가래칠기 해변이 훤히 보이는 언덕 위에 조기역사관을 지었다. 돛과 노를 쓰던 초창기 조기잡이 배를 복원해 탑을 세우고 조기 파시의 장관을 담은 사진 따위를 전시해 놓았다. 그 중 1957년 연평의 사진은 섬이 아니라 여느 대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당시 연평에는 봄부터 가을까지만 영업하는 임시 객장이 100호를 넘었다고 하니 그리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여기 섬사람들에게 조기는 추억이자 자부심이다.
대연평도 당섬 선착장에서 내려 남쪽으로 가면 안목어장이 나온다. 임경업 장군이 가시나무 어로법을 최초로 전수해 주던 현장이다. 연평리 마을 안 면사무소 뒤편으로 가다보면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그 위에 작은 사당이 하나 있다. 임경업 장군을 숭모하고 제향 하는 사당, '충민사'다.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오르면 '조기역사관'과 '어민 위령비' 그리고 등대공원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 이른바 '조기 파시 탐방로'의 주요 루트다.
조기역사관 입구는 오래전 은퇴한 것으로 보이는 대잠헬기와 장갑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그 안쪽엔 제 1, 2 연평해전에서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한 25 용사들의 넋을 기리는 평화공원이 있다. 그 수만큼의 용치(적함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쇠기둥) 조형물 주위로 용사들의 위패와 부조물이 새겨져 있다. 그 언덕 아래로 조금만 내려가면 위령비가 서 있다. 고기 잡다 재해에 희생된 어부들과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장병들이 한 자리에서 후손들의 추모를 받는 격이다.
▲ 기형도 추모공원(?) 공원이라하기엔 멋쩍을 만큼 작다. 그러나 기형도는 연평도에서 태어난 인천사람이 분명했다. 기형도 축제를 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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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형도 작품 질투는 나의 힘 등 5편의 시작 나무판자 위에 새겨져 있었다. 이게 다다. 믿기지 않겠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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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을 따라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서 얼핏 본 안내판엔 '기형도'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뜨였다. '혹시 저게 그?' 했지만 안내판엔 별 다른 부연설명이 없었다. 백여 미터쯤 들어가자 수줍게 숨은 듯 자그마한 쉼터가 하나가 있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거긴 시인 기형도를 기리는 공간이었다. 그는 1960년 연평도에서 황해도 실향민의 후손으로 태어났다고 했다. 일찍이 가족과 함께 광명으로 이주했지만 그는 분명 인천 사람이었던 거다.
인천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다 자신했던 나도 그걸 몰랐다. 거기 가서야 알았다. 그러고 읽으니 그의 시들이 새삼 달라 보였다. 특히 대표작 '안개'가 그랬다. 그는 도시 샛강에 끼는 안개를 '거대한 강', '홀로 갇혀 있음을 알고 경악하는',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 등으로 묘사했다. 도시에선 그런 육중한 안개가 흔치 않다. 혹시 그는 유년 시절 연평 앞바다에서 본 장엄한 해무를 그 도시의 안개에 오버랩 한 건 아니었을까.
인천 사람으로 그를 독점하고픈 욕망의 고백이겠지만 출생지가 분명하니 이제라도 그를 제대로 추모하면 어떨까 싶다. 일단 그 이름 없는 해변과 다리부터 기형도 해변, 기형도 다리라 부르자. 돈 드는 일도 아니다. 그가 태어난 춘삼월에 그 해변에서 기형도 시 축제도 벌여보자. 그의 시를 함께 낭독하고 거기에 음을 붙여 노래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대로 시 배틀도 붙는 거다. 해보자. 물론 지금의 추모공간은 네댓 배 쯤 더 키울 필요는 있다. 지금은 너무 작고 초라하다.
연평사람들의 60% 이상은 기형도와 같은 운명의 실향민이다. 그네들은 이 섬이 황해도 땅이었을 때 건너왔다 눌러 앉아야 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먼저 이승을 떠난 이들에게 각별하다. 고향 땅을 눈앞에 두고 눈을 감아야 하는 안타까운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아서다. 그러지 않아도 섬사람들은 뭍보다 조상을 훨씬 더 극진히 모신다. 그들의 영이 바다에 깃든다고 믿기 때문이다. 섬 곳곳에 세워진 사당과 탑과 비는 그 간절한 추모의 심정을 상징한다.
가장 현명한 추모의 방식은 그를 기억하고 그 이름을 오래도록 불러주는 것이라 한다. 멕시코에서는 이승에서 누군가 그를 더 이상 불러주지 않을 때 비로소 저승으로 간다고 믿는다지 않던가. 시인 기형도는 그 짧은 생애만큼 강렬한 시를 남겼다. 그의 언어는 영원히 기릴만한 불멸의 유물이다. 바라건 데 이 비루한 한 여행객의 바람이리도 그냥 스쳐듣지 않기를, 그래서 내년이고 언제고 그의 고향 앞바다에서 그의 시가 울려 퍼지기를 진심을 다해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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