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한 차별주의자라 해도 뻔뻔하게 다짐합니다
[최지혜 기자]
1964년은 미국 역사에서 중요한 해다. 흑인 차별을 금지하는 민권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1863년 노예 해방이 이루어지고 100년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어떤 백인들은 이 법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림책 <1964년 여름>은 그 시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흑인 소년인 존 헨리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다. 둘은 함께 집안일을 돕고 구슬치기도 하고 냇가에 가서 수영도 한다. 하지만 내 친구 중에 가장 수영을 잘하는 존 헨리는 마을 수영장에 들어갈 수 없다. 흑인 금지 구역이기 때문이다. 아이스크림 가게 역시 마찬가지다.
존 헨리는 눈물을 글썽였어요.
"나는 여기서 수영하고 싶었어. 나도 너랑 똑같이 하고 싶었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나는 좋은 생각을 해낸다.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러 존 헨리와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이다. 나는 친구와 어깨동무를 하고 가게 앞문으로 걸어간다.
▲ "백인 전용 수영장에서 나가라"…흑인 형제 집단 폭행, JTBC 유튜브 사건반장 화면 캡처 |
ⓒ JTBC |
이와 비슷한 일이 며칠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일어났다. 백인들이 백인 전용이라면서 수영장에 들어온 흑인 소년들을 폭행한 것이다. 아직도 이런 노골적인 인종 차별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에 현지 사회에서는 큰 공분이 일었다고 한다.
그림책 <1964년 여름>과 놀랍도록 닮아있는 기사를 접했을 때 사실 그리 놀라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인종 차별이 만연한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1960년대보다는 법과 의식의 측면에서 나아졌다고는 하나 변화된 사회 속에서 차별은 보다 복잡 미묘해졌다.
21세기라고 인종 차별이 사라졌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쉽게 없어질 것 같지도 않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 해외여행을 떠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중국인으로 오해받아 해코지를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물론 그전에도 아시아 여행자들은 여러 인종 차별을 당했다. 나에게도 기억나는 몇 가지 사건이 있다.
한번은 영국의 한 길거리를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눈덩이가 날아왔다. 낄낄거리다 이내 사라진 사람들. 나는 뭐라고 대꾸할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아일랜드에 머물고 있던 한 친구는 집으로 향하는 길에 누군가가 던진 달걀을 정통으로 맞았다. 아픔과 놀라움보다 무서워서 얼른 그 자리를 피했다고 했다.
오스트리아 기차 안에서는 대놓고 인종차별을 당하기도 했다. 바로 승무원으로부터다. 백인 남자 승무원은 내 친구가 실수를 하자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우리는 이는 명백한 인종차별이라며 오스트리아철도청 SNS 계정에 항의글을 올렸다.
어디에서 무슨 연락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잠시 뒤 그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기차에서 내릴 땐 캐리어까지 손수 옮겨주며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물론 그의 사과가 진심이라고 믿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지만.
사실 유럽에 가보기 전까지 인종 차별은(당하는 입장에서의) 나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하는 편에 서보니 이렇게 억울하고 황당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겪은 후 나는 인종차별에서 떳떳해졌을까?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대다수는 피해자보다는 여전히 가해자와 가깝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에는 한국에 만연한 '다문화' 차별에 대한 여러 예시가 나온다. 한 중학생은 "종례 뒤 선생님이 '다문화 남아!'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도 이름이 있는데 '다문화'로 부르셨다. 선생님이 내가 마치 잘못을 했다는 듯 말씀하셔서 큰 상처를 받았다"라고 했다.
저자는 "차별은 단순히 지폐나 동전이나, 햄버거나 영화의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에게 인종이나 피부색을 이유로 그를 공공의 구성원으로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때, 그가 당연히 느낄 모멸감, 좌절감, 수치심의 문제이다"라는 아서 골드버그 대법관(1964년 민권법에 반발하여 소송을 건 백인에게 기각 판결을 내린)의 판결문을 인용한다.
▲ <1964년 여름> 뒤표지와 앞표지 어깨동무를 한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연대의 힘이 느껴진다. |
ⓒ 느림보 |
<1964년, 여름>의 첫 페이지에서 '나'는 친구와 엄마의 이름을 알리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존 헨리 와델은 나와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존 헨리의 엄마, 애니 메이 아줌마는 우리 집에서 일을 도와주시지요.
백인인 '나'의 이름과 엄마, 아빠의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작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 부분이 참 좋았다. 무수한 인종 차별 중의 한 이야기가 아닌, 내 친구 '존 헨리'의 이야기가 될 때 마음의 거리는 보다 가까워진다.
차별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진 이미지는 개개인의 고통을 상실한다. 결이 조금 다르지만 대형 참사에서 희생된 이들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들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편, 이번 사건 기사를 보는데 오래전 읽었던 수전 손택의 작품 <타인의 고통>에 실린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린치를 당해 나무 위에 매달린 흑인들을 배경으로 히죽대며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백인 무리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스스로 '차별주의자'라 인정하며 사는 나는 자주 뜨악한다. 차별이라는 촘촘한 그물망에 넣어 나를 걸러내다 보면 수시로 실망한다. 딴 생각을 하다가 계단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인사를 무심코 지나쳤을 때, 마트에서 장을 보는 흑인 남성을 한 번 더 쳐다볼 때, 혹시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차별 의식의 발로일까 싶어 흠칫한다.
때때로 나는 왜 배려와 존중이라는 덕목을 기본 사항으로 탑재하지 못했나, 애써 의식하고 노력해야지만 겨우 부끄러움을 면하는 것일까 한숨이 나온다. 그럴 땐 차별에 대해 더 알고 싶지도 않다. <선량한 차별주의자> 같은 책은 사놓고 덮어두고 싶다.
그래서 글을 쓰는 지금도 마음이 어렵다. 나는 이 주제에서 너무 자유롭지 못하므로. 하지만 여전히 어딘가에서 쏟아져내리는 차별을 벌거벗은 채로 맞고 있을 이들을 생각하며 뻔뻔함을 발휘해 본다. 수영장의 아스팔트를 퍼내지는 못하더라도 아이스크림 가게 문의 손잡이 정도는 잡아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다시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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