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학살터에서 아이들이 부른 '그날이 오면'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서부원 기자]
발단은 지현(가명)이의 강의였다. 겨울방학을 앞둔 어느 날, 학년 친구들 앞에서 6.25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한 시간짜리 수업을 진행했다. 그는 당시 죽임을 당한 민간인의 숫자에 견줘 교과서의 내용이 지나치게 소략하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강의를 준비했다고 했다.
근래 공개된 미국의 국립 문서보관소의 사진 등을 가져와 프레젠테이션 자료로 만들고, 일일이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소개하는 그의 모습은 역사학자 저리 가라 할 만큼 진지했다. 평소 졸기 바빴던 아이들도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당시의 사진과 영상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어서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열정적인 수업에 감동한 몇몇 아이들이 뭉쳤다. 사진에 등장한 학살의 현장을 직접 가보자며 의기투합했다. 역사 교사로서,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내심 그들이 대견했고 뿌듯했다. 마치 학교의 역사 동아리 활동을 위한 예산이 남아있던 차여서 계획을 실행할 종잣돈으로 삼았다.
답사할 장소는 프레젠테이션 자료에서 언급된 곳과 진상규명 과정을 거쳐 추모공원이 조성된 곳으로 선정했다. 교통 여건을 고려해 서울과 수도권 지역은 제외하고, 대전과 대구, 지리산 자락에 산재한 곳을 답사하기로 했다. 동선을 대충 그어보니 당일치기로는 어림도 없었다.
세부 계획안을 만들어 학교장의 승인을 받고, 학부모의 동의를 얻는 등 일사천리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렌터카를 빌려 내가 직접 운전하기로 했다. 자발적으로 모인 7명의 현대사 '덕후'들과 민간인 학살을 주제로 한 수업 후 답사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 대전 산내 골령골 학살터 풍경. 주변 나뭇가지에 내건 만장과 현수막 펄럭이는 소리만 들리는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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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화)부터 11일(수), 이틀 동안 대전의 산내 골령골 학살터와 경북 경산의 코발트 광산 학살터, 거창 사건 추모공원과 산청 함양 사건 추모공원, 이렇게 네 곳을 다녀왔다. 도중 휴게소 삼아 국립 대전현충원과 경북 구미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들르는 일정이었다.
부러 두 곳을 끼워 넣은 이유가 있다. 민간인 학살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친일 부역자였음에도 6.25 전쟁 중 공적을 세워 현충원에 묻힌 자들을 기억하자는 취지고, 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킨 뒤 반공주의를 앞세워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 요구를 억누른 건 삼척동자도 아는 바다.
단순하게 말하면, '죽이거나 방조하고, 입을 틀어막은' 자들과 그들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죽임을 당한' 이들을 함께 만나는 답사 여행쯤 되겠다. 6.25 전쟁 중 공적이라면, 남침한 북한군을 물리친 것으로 여기기 쉽다. 하지만, 그들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적법한 절차도 거치지 않고 민간인을 학살한 것 또한 공적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는 현실이다.
▲ 국립 대전현충원의 유일한 '꽃 대궐', 백선엽 묘소. 워낙 화려하게 치장되어 멀리서도 눈에 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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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현충원과 자동차로 30분 거리인 산내 골령골 학살터 역시 컹컹 개 짖는 소리와 길게 늘어뜨린 만장의 펄럭이는 소리만 들릴 뿐 찾는 사람의 발길은 없었다. 쾌청한 하늘의 한낮이었는데도 스산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아이들도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친다며 움찔거렸다.
최대 8천 명이 이곳에서 학살됐고, 진상규명은커녕 아직 수습되지 않은 유해가 부지기수라는 소개 글에 아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서울을 버리고 이곳으로 피신한 직후 벌어진 학살이라는 점에 더욱 놀라워했다. 왜 이러한 내용이 역사 교과서에 일언반구조차 없는지 반문하기도 했다.
학살터를 돌아 나오는 길 바로 곁 산내초등학교를 지나며, 차 안에서 아이들끼리 토론이 붙었다. 과연 저 초등학생들도 이곳에서 엄청난 집단 학살이 자행됐다는 사실을 아는지 궁금하다는 한 아이의 질문으로부터 비롯됐다. 아직 어려서 알면 해롭다는 주장과 진실을 아는 게 나이와 무슨 상관이냐는 주장이 첨예하게 맞부딪혔다.
토론의 승패는 나지 않았다. 승패 대신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른들도 이 사건에 대해 생소해할 거라는 푸념을 쏟아내는 것으로 마무리가 됐다. 이번 답사의 모티프를 제공한 지현이조차 기성세대 중 6.25 전쟁 중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아는 분들이 열에 한두 명도 안 될 거라고 장담하듯 말했다.
대전에서 대구로 향하는 길은 전쟁 초기 이승만의 피난길이기도 하다. 그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도 속절없이 패퇴하는 국군을 질타하며 대구를 지나 부산까지 도망쳤다. 그가 퇴각할 때마다 곳곳에서 집단 학살이 자행됐고, 이유인즉슨 하나같이 이적행위가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갱도 입구, 잠긴 철문 앞에서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 경산 코발트 광산 학살터에 도착했다. 역시 인적은 없었고, 골짜기를 타고 내려오는 겨울바람만 스산한 소리를 냈다. 이곳에 끌려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뒤 아직도 구천을 떠도는 이들이 내는 울부짖음 같아서 옷깃을 여미게 된다.
이곳에서도 최대 7천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열 명, 백 명이 죽으면 비극이지만, 천 명, 만 명이 죽으면 그저 통계일 뿐이라더니, 아이들은 그 어마어마한 숫자에 시나브로 둔감해졌다. 아이들은 학살이 지하 갱도에서 벌어진 탓에 대전 산내 골령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라고 했다. 갱도 입구에 자물쇠 채워진 철문만이 이곳이 학살터임을 보여주고 있다.
▲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의 '진혼곡' ⓒ 서부원 |
'그날이 오면'을 택한 건 나름의 이유가 있다. 영화 <1987>의 OST로서, 아이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노래라는 점도 있지만, 6월 민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공유하자는 취지였다. 6월 민주항쟁은 제주 4.3 항쟁과 5.18 민주화운동을 비롯해, 6.25 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에 이르기까지, 불의한 정권에 입막음 당하고 짓밟혀온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가 봇물 터져 나온 계기였다.
알다시피, 6월 민주항쟁 직후 5공 청문회가 열렸고, 공중파 방송사에서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등의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시민들의 정의감에 불을 지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했고,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설립까지 이어졌다. 한없이 더디긴 했어도 의미 있는 역사의 진일보였다.
'그날이 오면'을 목놓아 부르면서 아이들도 깨달은 바가 있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는 말은 문화재를 감상할 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는 거다. 전국 각지에서 민간인 학살이 자행됐다는 사실을 배웠고 현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 이 땅에서 더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굳은 다짐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한 아이는 아직도 쉬쉬하고 있는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역사를 조금 더 깊게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을 피력했다. 몰랐다면 모를까, 이제 알았으니 모르는 척할 수는 없다고 당차게 말했다. 답사를 떠나기 전 경산 코발트 광산 희생자 유족회의 연락처를 내게 건네면서, 유족분을 만나면 더 유익한 역사 공부가 될 것 같다고 했던 아이다.
-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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