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바지를 캔버스로... 젊은 태국 작가의 특출남
[김형순 기자]
▲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전시가 열리는 국제갤러리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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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시작된 '역사회화' 연작 2022년 판이 이번에 소개된다.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 세계적 경제불황, 재유행하는 코로나 등 혼미에 빠진 지구촌 시대, 이 난제를 작가는 회화로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궁금하다. 작가는 세상을 정화하듯 불길로 태우고 그 재를 거름 삼아 불사조처럼 인류 문명사에 새로운 기원을 일으키고자 한다.
그는 현대소비문화의 아이콘인 청바지(데님)를 작품의 재질로 삼는다. 청바지는 미국에서 시작했지만 이젠 전 지구인의 애용품이다. 이를 캔버스로 대신해 그만의 독창성을 획득한다. 그걸 태워 그리는 방식, 아무도 시도하지 않는 실험작업임이 틀림없다.
회화 앞에 역사라는 무거운 단어를 붙인 건 그의 작업도 관객이 참여자가 되어야 완성된다는 것 때문이리라. 하긴 그게 현대회화의 특징 아닌가. 난 이게 궁금해 작가에게 물으니 "전시장 바닥을 밟는 것도 관객이 간접적으로 내 작품 속에 들어오는 방법"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I '생존하는 유일한 것(The only thing that survives)' 표백한 청바지 데님에 푸른 금박이 들어간 아크릴 중합체(polymer)를 캔버스 위에 잉크젯 잉크로 프린트, 218.4×162.6cm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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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재가 되고, 재가 다시 불이 되게 하는 이런 원리는 창조와 소멸이라는 우주적 순환구조를 닮았다. 한용운의 시 구절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도 떠오른다. 이는 色(有)과 空(無)이 하나라는 '색즉시공'의 원리와 같은 것이 아닌가.
그가 보기에 불과 재는 문명의 시작이자 죽음을 상징인 모양이다. '정반합'처럼 이를 통해서 생명을 다시 잉태시키는 원리라고 할까. 이런 법칙은 죽음이 삶이 되고, 번뇌가 치유가 되고, 고통이 구원된다는 '고집멸도(苦集滅道)' 같은 불교의 역설적 진리와 맞닿아있다.
▲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I '모팅 제이(The Mocking Jay)' 표백한 청바지 데님에 푸른 금박이 들어간 아크릴 중합체(polymer)를 캔버스 위에 잉크젯 잉크로 프린트, 218.4×162.6cm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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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놀란 것은 그걸 태우면서 나온 잔여물은 버리지 않고 바닥에 깐다. 파멸과 악몽에 빠진 세상을 보며 탄식하기보단 '신은 땅에 있다'는 그의 작품명처럼 좋은 '역사'는 땅속에 깊이 묻고 그 의미를 조금씩 꺼내 작품 할 때마다 재활용하겠다는 다짐 같다.
▲ 두 작품('세상이 불타오르던 때를 누가 증언할 것인가?'와 '산꼭대기의 엑스터시, 신은 땅에 있다) 앞에서 선 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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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가는 1986년 태국 방콕에서 태어났다. 2009년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대학교에서 미술학사를 취득하고, 2012년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미술학 석사 받았다. 뉴욕을 기반으로 작품을 한다. '방콕에서도 '고스트'라는 예술 및 퍼포먼스 축제의 공동 설립자로 활동한다.
그는 또 스톡홀름 현대미술관(2022), 싱가포르 아트뮤지엄(2022), 쿤스트할트 론헤임(2021), 밀라노 스파치오마이오키(2019), 헬싱키 현대미술관(2017), 파리 팔레 드 도쿄(2015), 뉴욕 모마 PS1(2014) 세계 유명미술관에서 전시를 열었다. 그리고 광주(2021), 베니스(2019), 휘트니(2019), 이스탐불(2019), 시드니(2016) 전 세계 비엔날레에 참여했다.
▲ 제13회 광주비엔날레 때 작가가 선보인 작품 '죽음을 위한 노래(Songs for Dying)' 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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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가 다양한 이 작가를 더 이해하기 위해 2021년 광주비엔날레 출품작도 소개해 본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자료엔 보면 최근 돌아가신 그의 할아버지와 한국에 와 들은 제주 4.3 항쟁과 태국 민주화 과정에서 죽어간 이들에 대한 넋을 애도하는 세 이야기가 혼합된 것이다. 회화와 영상을 이중주처럼 짝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불귀의 넋의 추모 아니면, 인간의 삶, 그 유한성을 뛰어넘고자 한다고 할까? 영생과 장수의 상징인 거북이가 무당처럼 등장시킨다. 거북이는 육지와 바다를 오가며 천지의 비밀을 안다는 신령한 동물이다. 어딘지 한국의 굿판 냄새가 난다. 불사조 같은 이 토템을 통해 위기에 처한 문명사의 새 탄생을 기원하며 그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 '땅이 숨을 쉬기 시작하고 바람 속에서 조상들이 나와 함께 노래하는 소리가 들린다(The ground starts to breathe, and in the wind I can hear my ancestors singing along with me)' 표백한 청바지 데님에 푸른 금박이 들어간 아크릴 중합체(polymer)를 캔버스 위에 잉크젯 잉크로 프린트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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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위에서 태국 국기는 국왕, 국민, 불교를 상징하는 삼색을 썼다. 그에게 예술의 눈을 뜨게 해준 덴마크 작가 '엘리아슨(O. Eliasson)'의 '기후 프로젝트'의 영향도 보인다. '땅이 숨을 쉬기 시작하자 바람 속에서 조상들이 나와 함께 노래하는 소리가 들린다'가 위 작품명이다. 땅은 지구, 조상은 인류라고 노래하며 이상향을 향한 작가의 열망이 보인다.
그 옆 작품명은 "꿈은 역사보다 더 강하다". 예술가란 대답을 하는 자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자이다. 또 역사보다 꿈을 더 믿는 몽상가이다. 그가 바로 그런 작가다. 인류가 동서양의 시공간을 넘어 종교와 이념을 넘어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향을 그린 것 아닌가. 그곳에 서광이 비친다. 이 작품은 우리로 치면 현대판 '몽류도원도'라 할만하다.
▲ 작가가 쓴 시 "태초에 발견이 있었다(In the beginning there was discovery) […] 가 전시장 바닥에 부조의 형식으로 새겨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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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그는 이번 연작의 종합처럼 전시장 바닥에 부조로 시를 새겨놓았다. 태초, 악몽, 혼란, 향수, 애도 같은 어휘가 보인다. 2017년 NYT 인터뷰에서 "난 태국에서 왔고 항상 불교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 신문은 그를 "몽상적, 명상적 작가"로 평했다. 아래가 그런 분위기다.
"태초에 발견이 있었다 / 잠을 방해하는 새로운 악몽 / 혼란에 질서를 부여할 필요 / 우리는 외면당한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 격변 너머에 광휘 있고 / 통합에 대한 향수 / 애도의 땅에서 / 공기에, 잡을 수 없는 것에, 당신을 맡긴다 / 유령은 갖지 못한다, 아무것도."
인류가 '애도의 땅'에 살고 있지만 불과 재가 결합해 에너지를 뿜어내듯, 인류가 하나가 되는 불사조의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고 할까. 이 옆 작품명도 같은 주제다. "내가 잠들려 누웠을 때, 당신이 내게 말하는 걸 들어요. 장미가 피는 세상에서 다시 만나요. 그곳에서 천사들은 노래하고 날마다 언어도 다 사랑가로 들릴 거예요." 다만 '연가' 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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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국제갤러리 홈페이지(https://www.kukjegallery.com), 전시 입장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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