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독주에 맞서다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김삼웅 기자]
▲ 이승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 및 제3회 광복절 기념식 |
ⓒ 대통령 기록관 |
예나 지금이나 최고권력자에게 '찍히면'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서민호는 미국 유학시절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하고 지극히 어려웠을 때 그를 지원하고, 해방 후 그가 환국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자 그의 편에 섰다. 하지만 이승만 부부에 대한 충언을 했다가 찍히게 되고, 치열한 의정활동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의 정적 또는 라이벌은 비참하게 처리되었다. 제헌의원 선거 당시 서울 동대문구의 경쟁자였던 독립운동가 최능진은 6.25 전란기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선고(집행)되고, 그의 최측근들인 88구락부의 김구 암살, 제4대 대통령선거 당시 경쟁자 진보당후보 조봉암의 사법살인 등이 이에 속한다.
서민호는 "이승만이 자신이 국회조사단으로 현지에 나타나기만 하면 어떤 수단으로든지 암살시키라는 지령이 내려졌다. 엄청난 정보를 입수하였다."고 폭로하고, 동료의원들의 만류로 합동조사단의 활동에서는 빠졌다. 정권의 실세 장택상이 "이박사가 당신을 잡으라고 하니 잠깐 피신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권유하기도 했다.
6ㆍ25한국전쟁 발발 2년 차인 1952년이 되었다. 이승만의 임기가 끝나고 제2대 대통령선거가 실시되는 해이기도 했다. 1951년 7월 개성에서 처음으로 휴전회담이 개최된 데 이어 10월 25일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열렸다. 전쟁은 소강상태에서 휴전(정전)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대통령 재선을 위해 여러가지 계략을 거듭하였다. 국회 의석의 분포로 봐서는 도저히 재선이 불가능한 구도였다. 그래서 짜낸 것이 대통령직선제 개헌이었다. 상식적으로 대통령선거가 직선제라도 전시하에서는 간선제로 바꾸는 것이 도리일 터인데 이승만은 거꾸로였다. 국가의 안위나 일반 상식보다 자신의 권력욕을 우선시 한 것이다.
이승만은 제2대 대통령선거에 대비하면서 1951년 11월 23일 자유당을 발족했다. 원내의 공화민정회, 원외의 국민회, 대한청년단, 대한노총, 대한부인회, 농민조합연맹 등의 대표들을 모아 신당발기준비협의회를 구성했다. 그러나 당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내파와 원외파로 분열되었다. 원내파는 이갑성을 중심으로, 원외파는 이범석을 중심으로 각각 자유당을 발족, 하나의 이름으로 두 개의 정당이 만들어지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이승만은 재집권을 위한 대통령 직선제 및 양원제 개헌을 앞두고 두 개의 자유당을 하나로 통합하여, 악명 높은 자유당을 만들었다. 자유당은 향후 10여 년 동안 집권당으로서 온갖 악행을 자행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1951년 11월에 제안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은 공고기간을 거쳐 1952년 1월 28일 국회의 표결 결과 재적 163명 중 가 19, 부 143, 기권 1로 부결되는 참패로 끝나고 말았다. 민국당 등 야권은 여세를 몰아 1952년 4월 국회의원 123명이 내각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당황한 이승만은 5월 14일 국회에서 이미 부결된 직선제 개헌안을 다시 꺼내 맞불을 놓았다.
직선제 개헌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승만은 자유당과 방계단체인 국민회, 한청, 족청 등을 동원하여 1952년 1월 말부터 백골단·땃벌떼·민중자결단 등의 명의로 국회의원 소환 벽보와 각종 삐라를 살포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또 전국애국단체 명의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 지지 관제데모, 가두시위, 국회 앞 성토대회, '민의 외면한' 국회의원 소환요구 연판장 등 광적인 이승만 지지 운동을 전개하였다.
관제데모와 경찰의 방관·방조 등으로 국회와 사회의 반이승만 정서는 더욱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야당은 국회에 개헌정족수인 3분의 2보다 1표가 더 많은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제출하기에 이르렀다. 국회의 분위기가 내각책임제 개헌으로 기울게 되자 이승만은 강압적인 수법을 동원했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직선제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이승만은 5월 25일 정국혼란을 이유로 부산을 포함한 경남과 전남북 일부 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영남지구계엄사령관에 측근 원용덕을 임명하는 등 군사력을 개헌 공작에 동원했다. 적과 대치 중인 전방 전투부대까지 후방으로 빼내어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다.
계엄사령부는 즉각 언론검열을 실시하는 한편 내각책임제 개헌추진을 주도한 의원들의 체포에 나섰다. 서민호·곽상훈·서범석·권중돈·정헌주·이석기 의원 등이 체포되었다. 5월 26일에는 국회의원 40명이 타고 국회에 등청하는 통근버스를 크레인으로 끌어 헌병대로 연행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시영·김창숙·김성수·장면 등 야당과 재야 원로들은 부산에서 호헌구국선언대회를 열어 이승만 독재를 규탄하고 나섰다. 그러나, 6·25기념식장에서 김시현·유시태 등의 이승만 암살미수사건이 일어나면서 야권은 완전히 전의를 잃게 되었다.
장택상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국회 해산을 협박하면서 발췌개헌안을 제안했다. 발췌개헌안이란,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직선제와 양원제에다 야당이 제안한 개헌안 중 국무총리의 추천에 의한 국무위원의 임명,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결의권 등을 덧붙힌, 두 개의 개헌안을 절충형식을 취한 내용이었다.
발췌개헌안은 7월 4일 심야에 일부 야당 의원들을 강제연행하고, 경찰·군대와 테러단이 국회를 겹겹이 포위한 가운데 기립 표결로서 출석 166명 중 가 163명, 기권 2명으로 의결하고, 7월 7일 공포하였다. 비상계엄은 28일 해제되었다.
발췌개헌은 이승만의 권력연장을 위한 사실상 친위쿠데타였다. 개정 헌법에 따라 8월 5일 실시된 첫 직선제 대통령선거에서 이승만은 74.6%의 득표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조봉암과 이시영은 각각 유효표의 11.4%, 10.7%를 획득했다. 전시하에서 이승만의 일방적인 선거운동의 결과였다. 정치상황을 다소 길게 소개한 것은 서민호를 재구속하게 된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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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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