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작가가 "유레카" 외친 이 배우…'러브 액츄얼리' 그 가수

전수진 2023. 1. 1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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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배우 빌 나이. 최근작인 '리빙'으로 아카데미상 수상 후보로 점쳐진다. AFP=연합뉴스


'러브 액츄얼리'도 '어바웃 타임'도 이 영국 배우가 없다면 심심했을 터다. 빌 나이(73). 이름은 몰라도, 한물갔다가 크리스마스 캐럴로 컴백한 꺽다리 가수('러브 액추얼리')부터, 아들 결혼식에서 "나이 들면 사람 다 똑같으니 내 아들처럼 착한 사람과 결혼하는 게 좋다"고 축배를 드는 아버지('어바웃 타임') 역할 하면, '아, 그 사람'이라고 할 만하다.

뉴욕타임스(NYT)는 12일(현지시간) 그와 인터뷰에서 "빌 나이는 스텔스기 같은 배우"라고 표현했다. 스텔스(stealth), 즉 레이더망에 잡히지 않는 기능을 탑재한 전투기처럼 관객의 마음에 슥 다가와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의미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열연한 빌 나이. [영화 공식 스틸컷]


'어바웃 타임' 감독이면서 '노팅힐' 각본가인 리처드 커티스와 그가 다시 뭉쳤다. 영화 '리빙(Living)'에서다. 3월에 예정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러 부문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작품이다. 일본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의 '살다'의 리메이크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이시구로 가즈오(石黒一雄)가 제작에 참여했다. 이시구로 작가는 커티스 감독과 빌 나이와 절친한 사이다.

그는 국내에선 의뭉스러우면서 유머스러운 역할의 신 스틸러 조연으로 잘 알려져있지만,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근작 중에선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아네트 베닝과 함께 해로 아닌 황혼이혼을 택하는 노년의 남자 역을 진중하게 소화하기도 했다. 연극 무대에서부터 다져온 탄탄한 연기력으로, 70편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 '리빙'의 빌 나이. AP=연합뉴스


연기의 시작은 우연이었다고 한다. 차량 정비 일을 했던 아버지와 간호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누군가 '배우 한 번 해보지 그러냐'고 해서 '뭐 그래 볼까'라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학교 연기 동아리에서 점차 연기에 재미를 붙인 그는 고향인 영국 남동부 서레이 지방에서 런던으로 상경했다. 이후 연극계에서 먼저 이름을 알렸고, 영화계 스텔스처럼 녹아들었다. 그는 NYT에 "연기를 오래 해왔지만 정작 연기에 대해 설명하는 건 쉽지 않다"며 "연기는 설명하려고 하기 시작하는 순간 엉망이 된다"며 웃었다.

그의 연기를 대신 설명해 줄 사람은 많다. 커티스 감독은 NYT에 "빌 나이는 기품이 있으면서도 친절한 성품의 배우"라며 "감독으로서 그와 같은 배우를 찾아냈다는 것은 인생 최고의 행운 중 하나"라고 말했다. '남아있는 나날' 등으로 유명한 이시구로 작가는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빌 나이에 대해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이미지를 연기하는 것은 영국 배우로서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영국이라는 이미지는 유지하면서 거기에 자신만의 플러스 알파를 적절히 얹어내는 것은 대단히 어렵다"며 "그걸 바로 해내는 배우가 빌 나이"라고 말했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의 빌 나이. [영화 공식 스틸컷]


'리빙'의 원작 '살다'에서 빌 나이는 주연을 맡았다. 원작은 평범한 공무원으로 의욕 없이 살다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인생의 바닥을 치는 와중에 작은 것에서도 기쁨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아낸다는 이야기다. 오해는 마시길. 아름다운 해피엔딩이 아니다. 이 공무원은 결국 먼지가 쌓여있던 프로젝트인 놀이터 건설을 성사시키시지만, 준공 직후 죽고, 그 공로는 공무원의 무능한 상사들에게 돌아간다.

구로사와 감독의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자는 아이디어는 이시구로 작가가 떠올렸다고 한다. 커티스 감독과 빌 나이와 함께 저녁을 하기로 했는데, 나이가 사정이 생겨 늦게 도착했다고 한다. 빌 나이를 기다리는 이들은 그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당시 이시구로가 "빌 나이가 이 역할을 꼭 연기해야 한다"고 유레카를 외쳤다고 NYT는 전했다.

가즈오 이시구로. [연합뉴스]


'리빙'은 나이에게 어떤 영향을 줬을까. 괴로움으로 가득한 일상에서도 기쁨을 찾아낼 수 있다는 교훈? 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나이라든지, 죽음이라든지 이런 거에 대해 생각하라는 세상의 메시지들은 대개가 글쎄, 근거 없는 믿음이거나 상술의 일종인 마케팅이다. 나이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곤 하지만, 글쎄 그런 게 진짜 있을까? 세상에 정해놓은 틀에 스스로를 가두지 않았으면 한다. 이 영화에 출연한 건 행운이자 행복이다. 난 계속, 살아가고 싶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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