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아 “오래오래 행복하게 일하는 배우 되고 싶어요”
‘맘마미아’ 등 대작 주인공 꿰차
데뷔 후 10년 때 공허감에 슬럼프
‘이프덴’으로 1년 반 만에 복귀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2002년 12월. 당시 신시컴퍼니가 무대에 올린 뮤지컬 ‘렌트’의 최고 화제는 여주인공 미미 역으로 출연한 여고생 배우였다. 앞서 공개 오디션을 통해 뽑힌 이 여고생은 바로 정선아(38)다. 화려하게 데뷔한 그는 트레이드마크인 시원시원한 고음과 아름다운 몸매로 ‘맘마미아’ ‘지킬 앤 하이드’ ‘드림걸즈’ ‘아이다’ ‘킹키부츠’ ‘위키드’ 등 수많은 대작의 주인공을 꿰찼다. 명실공히 한국 뮤지컬계 톱스타로 군림해온 그는 지난해 출산으로 잠시 무대를 떠났었다. 지난달 개막한 뮤지컬 ‘이프덴’(2월 26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을 통해 1년 6개월 만에 무대에 복귀한 그를 9일 만나 데뷔 20주년 소회를 들어봤다.
“난생처음 겪는 임신과 출산 이후 다시 무대에 서기까지 좀 불안했어요. 무대에 대한 갈증이 컸지만, 자존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거든요. ‘관객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떨쳐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런데, ‘이프덴’ 공연 첫날 관객의 환호와 기립박수에 안도감과 함께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이프덴’은 12년 만에 뉴욕에 돌아온 39살 이혼녀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선택에 따라 각각 리즈와 베스라는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뮤지컬이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을 만든 극작가 브라이언 요키와 작곡가 톰 킷이 다시 한번 의기투합해 2014년 초연해 400회 넘게 공연됐다. 이 작품에서 엘리자베스는 매 순간 ‘만약~하면(If)’과 ‘어떻게 될까(Then)’를 고민하며 자신의 길을 찾는다. 직업, 사랑, 우정, 결혼, 출산, 육아 등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문제들이 엘리자베스의 선택에 따라 두 방향으로 펼쳐진다. 브로드웨이 초연은 뮤지컬 ‘위키드’와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으로 유명한 스타 배우 이디나 멘젤이 주인공으로 출연했었다.
“그동안 제가 ‘아이다’의 암네리스 공주나 ‘위키드’의 마녀 글린다처럼 화려하고 강렬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는데요. 일상적이면서 드라마가 강한 인물을 예전부터 연기해보고 싶었지만, 소위 ‘대극장 배우’인 제가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 같아요. 큰 가발과 화려한 메이크업을 벗고 소극장에서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관객에게 가깝게 다가서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저는 관객과 멀리 떨어진 대극장 무대에 설 때 더욱 안정되는 편이었어요. 그러다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여성을 다룬 ‘이프덴’을 만나면서 그동안 가보지 않은 길을 도전하고픈 용기가 생겼어요.”
임신 기간 22㎏이나 몸무게가 늘었던 그는 출산하자마자 다이어트와 운동을 시작했다. 무대 복귀에 대한 열망은 오래지 않아 그를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았다. 걸출한 가창력의 소유자지만 그는 출산으로 인한 목소리의 변화를 점검하기 위해 보컬 레슨을 받기도 했다. 그는 “관객을 빨리 만나고 싶었지만, 출산으로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프덴’ 공연을 위해 그 어떤 작품보다 준비를 철저히 했다. ‘이프덴’은 내가 두려움을 이기고 성장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잊지 못할 작품이다”고 밝혔다.
정선아는 인터뷰 내내 ‘이프덴’이 자신의 ‘인생 2막’을 여는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외적으로 지난 2021년 결혼과 소속사 이적에 이어 지난해 출산 등 최근 삶의 전환점이 되는 변화를 겪으면서 내적으로 인생관이나 연기의 폭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비혼주의자였고 아이를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가 된 지금의 내 모습이 좋고, 배우로서도 더 깊어지고 풍족한 마음을 가지게 됐다”면서 “‘이프덴’에 임신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결혼이나 출산 전에 연기했다면 지금만큼 세심하게 연기하진 못했을 것 같다. 극 중 아이와 관련된 장면에선 연기라고 할 것도 없이 저절로 감정이 솟아오른다”고 밝혔다. 이어 “관객 역시 ‘인간 정선아의 이야기이자 우리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이며 사랑해 주신다. 그간 ‘노래 잘한다’는 칭찬은 넘치게 받았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공감 간다’는 반응을 보고 작품이 가진 메시지의 힘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중학교 2학년 때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보고 뮤지컬 배우의 꿈을 품은 정선아는 데뷔 이후 쉼 없이 달려왔다. 특히 지난 20년간 영화나 드라마에는 한 작품도 출연하지 않고 오로지 뮤지컬에만 매진해 왔다. 지난 2021년 MBC 예능 프로그램 ‘복면가왕’에 출연해 가왕으로서 3연승을 거두는 등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 있지만, 다른 뮤지컬 배우들이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는 것과 달리 정선아는 무대에 천착하고 있다. 그 이유를 묻자 “공연이 더 좋아서”라는 단순한 답이 돌아왔다.
“저는 무대 위에서 관객과 있을 때 ‘내가 이것 때문에 태어났구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아요. 그동안 매체에서 제안을 받은 적도 있지만, 제게는 하고 싶었던 뮤지컬 작품들을 하는 게 더 먼저였습니다. 최근 김호영 등 친한 동료 뮤지컬 배우들이 다양한 매체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자랑스럽고 멋있는데요. 저는 아직까진 뮤지컬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쉼 없이 무대에 섰지만, 그에게도 슬럼프가 있었다. 데뷔 이후 10년쯤 됐을 때 공허감을 느끼며 깊은 우울감에 빠진 것이다. “빨리 잘 된 사람은 교만할 때가 온다고 하는데, 내가 그때 그랬던 것 같다. 데뷔부터 주역을 맡는 등 너무나 빨리 꿈을 이뤘기 때문에 간절함이 없어진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보면 배부른 고민이지만 당시엔 행복하지가 않았다”는 그는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능과 기회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면서 그는 다시 뮤지컬에서 행복을 찾았다.
“멋 모르던 어린 시절엔 ‘박수 칠 때 (뮤지컬계를) 떠나겠다’는 얘기를 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이젠 목표가 바뀌었어요. 관객의 사랑을 받으면서 동료들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일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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