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 고통스러워도 다음 세대에 공유해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음 세대에 이야기하고 희생자를 기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배신자가 누구였고 희생자는 누구였는지 알아야 역사의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 아무 것도 적지 않고 페이지를 넘기는 건 이상한 일 아닌가.” 최근 부산 수영구 부산아시아영화학교에서 만난 ‘다큐멘터리 거장’ 리티 판(58)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캄보디아에서 크메르루주 독재 정권 이후 영화를 찍기 시작한 첫 세대다. 1989년부터 다큐멘터리를 찍어 온 그는 ‘보파나, 비극의 캄보디아 여인’(1996)으로 몬테카를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하며 세계 영화계에 존재를 알렸다.
그는 “윗세대는 작품 속에서 로맨스나 일상을 많이 다뤘지만 내겐 기억에 의존해 작품을 만드는 일이 중요했다”며 “독재 정권 이후엔 캄보디아의 기억을 다룰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다큐멘터리 형식을 자주 선택했다”고 말했다. 리티 판 감독이 ‘기억’에 천착하게 된 데는 개인적인 경험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독재를 겪지 않았다면 아버지처럼 선생님이 되거나 우주비행사, 공무원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크메르루즈 정권은 많은 것을 파괴했고 내 가족을 망가뜨렸다. 비극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눈으로 본 비극은 그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리티 판 감독은 “죽은 가족들이 언제나 주변에 있는 것 같고,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내가 그들 중 누군가를 대신해서 살아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조용히 털어놨다.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리티 판 감독은 기억을 기록한다. 그는 “부모는 자식들에게 독재 정권에 대해 잘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려운 주제이고 고통스럽기 때문”이라면서 “이야기 나누지 않는다면 역사는 계속 우리를 쫓아올 것이다. 희생자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다는 걸 그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 나를 위해, 역사로 인해 고통받지 않았으면 하는 다음 세대를 위해 영화를 만든다”고 강조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끊임없이 진실을 찾는 리티 판 감독의 작품은 국제 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다큐멘터리 ‘피폭의 연대’(2020)로 제70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다큐멘터리상을, 지난해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은곰상 예술공헌상을 받았다.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는 기술 발전에 따른 혼란, 현대의 파괴적인 소비 행태, 극단주의의 부상에 대해 지적한다. 그는 “우리의 소비 패턴이 모든 걸 파괴하는 방식으로 보였다. 대표적인 방식은 ‘먹방’인데 우리는 이제 살기 위해 먹지 않고 마치 포르노를 찍듯이 먹는 걸 찍는다”면서 “그게 추하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기 위해 인간은 모든 걸 망가뜨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리티 판 감독이 다큐멘터리만 찍는 건 아니다. 장편 극영화 ‘종전 이후의 하루 저녁’(1998)은 1998년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다. “픽션도 많이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나를 다큐멘터리 작품으로 많이 기억한다. 그러다보니 제작자들도 픽션보다 다큐멘터리를 맡기며 투자하는 편”이라며 리티 판 감독은 웃었다.
그는 영화를 만드는 것 외에도 여러 활동을 해왔다. 캄보디아 영화위원회를 만들고, 수도 프놈펜에 보파나 시청각자료센터를 설립했다. 센터는 독재 정부의 양민 학살 사건인 킬링필드의 희생자 보파나에서 이름을 따왔다. 당시 사라진 시청각 자료들을 복원하고 대중에 제공하기 위해 만든 기관이다.
리티 판 감독은 “없어진 자료들이 많았고 정권 차원에서 아카이브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영화뿐만 아니라 사진, 음악 등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디지털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며 “하나의 모임 장소로 기능해 사람들이 즐기고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나갈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워크숍을 통해 매년 400명 이상의 영화 관련 기술자도 키우고 있다. 미래 세대를 위해 터를 닦고 후학을 양성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에게 최윤의 소설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는 인상적이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그는 영어 번역본을 읽고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리티 판 감독은 “최윤 작가에게 만나자고 연락하고 한국에 왔다. 당시 작가가 직접 대본을 쓰려 했고 영화를 준비했는데 제작으로 이어지진 못했다”며 “나중에 한국 감독이 영화(‘꽃잎’)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 저항과 고통을 잘 담아낸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어 “지금 한국에선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것과 별개로 과거의 기억을 다룬 작품을 사람들이 더 많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전 세대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후세대가 알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BIFF)와도 인연이 깊다. ‘종전 이후의 하루 저녁’은 제3회 영화제에, ‘방황하는 영혼의 땅’(2000)은 제5회 영화제에 초청됐다. 지난해 영화제에선 ‘에브리씽 윌 비 오케이’가 상영됐다. 아시아 영화인을 교육하는 부대행사인 ‘2022 CHANEL X BIFF 아시아영화아카데미’(아시아영화아카데미)의 교장을 맡기도 했다.
리티 판 감독은 “부산영화제에 첫 회부터 수 차례 방문했고 2013년엔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을 받았다. 부산을 좋아하고, 영화제가 성장하는 걸 같이 보게 돼 감회가 새롭다”며 “한국 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제 시위가 인상 깊었다. 한국인들이 강하게 자기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우는 모습이 아름다웠다”고 돌이켰다.
그는 스크린쿼터제에 대해 “지금 세계인이 다양한 한국 작품을 볼 수 있게 된 건 그런 노력 덕분이다. 자국 영화산업이 계속 발전할 수 있도록 배우와 감독을 보호한 똑똑한 움직임이었다. 다른 국가에도 좋은 예시가 된다”고 극찬했다.
3년 만에 열린 아카데미에서 젊은 영화인들을 만난 것에 대해 그는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리티 판 감독은 “그동안 우리는 모든 활동을 중단했고 문화생활을 하지 못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지만 이렇게 직접 와서 서로 만나게 됐다”며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에서 가장 힘있는 축제가 됐다. 젊고 전도유망한, 열정과 희망이 가득한 영화감독들을 만나는 일은 마치 보너스같았다”고 말했다.
다양한 문화 배경을 가진 아시아인들이 모여 여러 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리티 판 감독은 “그들은 20명의 젊은이이기도 하지만 14개 국가에서 온 사람들이다. 댜앙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상상력, 감정을 보고 있으면 대단하게 느껴지고 행복했다”고 말했다.
여성 감독의 비율이 높았다는 점은 특히나 고무적이었다. 그는 “60%가 여성인 점이 굉장히 좋았다. 4~5년 안에 이 많은 사람들이 여성 감독으로 우뚝 설텐데 이것이 영화계에 새로운 시각과 감각, 에너지를 가져올 것”이라며 “아시아 영화계엔 여성 감독이 많이 필요한 게 현실”이라고 짚었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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