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눠먹기 끝낼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신년 언론 인터뷰에서 중대선거구제 도입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총선을 1년여 앞두고 정치권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정당·지역·선수(選數)별로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까닭에 그 논의도 치열할 수밖에 없다. 중대선거구제는 한 선거구에서 2~5명의 당선자를 뽑는 제도다. 현행 소선거구제에서는 1위가 받은 표 외에는 사표(死票)가 되지만, 여러 명의 당선자를 뽑는 중대선거구제에선 이런 사표가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 소수 의사가 더 반영되고, 군소 정당의 의회 진출 길이 넓어지면서 의회 내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대선거구제 논의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지난해 6·1 지방선거 때 전국 30개 기초의회 지역구에서 중대선거구제가 시범 실시된 효과를 살펴봐야 한다고 조언한다. 서울 8곳, 경기 6곳, 인천 4곳, 대구 2곳, 광주 3곳, 충남 7곳 기초의원 선거에서 3~5인 중대선거구제가 시범적으로 도입됐는데 제도의 장점과 한계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국민의힘이 지지 기반으로 삼는 대구의 시범 실시 지역에선 국민의힘이 7석을 가져가고 더불어민주당이 2석을 확보했다. 민주당 텃밭인 광주의 경우 민주당이 6석을 차지하고 진보당이 2석, 정의당이 1석을 가져갔다. 결과적으로 거대 양당이 각자의 텃밭에서 의석을 싹쓸이하는 상황은 막은 것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중대선거구제 도입이 거대 양당의 ‘나눠 먹기’ 결과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30개 시범 실시 지역에서 총 109명의 기초의원 당선자가 나왔으나, 거대 양당을 제외한 소수 정당 당선자는 4명(정의당 2명, 진보당 2명)에 그쳤다. 전체 당선자의 3.7%에 불과한 수치다. 특히 서울·경기 지역에선 소수 정당 당선자가 전무한 가운데 국민의힘이 25명, 민주당이 30명의 당선자를 내며 여전히 ‘나눠 먹는’ 양상이 됐다.
중대선거구제 시범 실시 지역에서 당선된 기초의원들도 제도의 장점과 한계를 동시에 체감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중대선거구제가 의회의 다양성을 보장하고 경쟁의 선순환을 촉진한다는 점을 장점으로 꼽았다.
정의당 소속 김종호 인천 동구 구의원은 “구민들이 기존에 말하지 못했던 문제들로 저를 자주 찾아주신다”며 “의회에서 다루는 의제들도 전보다 다양해지면서 구민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민주당 소속으로 대구 수성구에서 당선된 차현민 구의원은 “소속 정당이 지역 내에서 입지가 좁다 하더라도 중대선거구제를 통해 당선 가능성이 더 커졌기 때문에 지역 현안을 더 잘 처리하고 주민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더 열심히 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전에는 정당만 보던 유권자들이 지금은 얼마나 일을 잘했는지 보겠다는 말을 많이 하신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있었다. 차 의원은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해도 여전히 의회 내 소수일 수밖에 없고, 일부 사안의 경우 다수당이 일방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도 “갈등이 심한 의회에서 소수 정당 의원들은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지적했다.
의회가 안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소수 정당 의원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가 여전히 어렵다는 얘기다. 결국 소수 정당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하는 경우엔 중대선거구제가 양당 독주체제를 탈피하는 데 극적인 효과를 내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중대선거구제 논의 과정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부정적 논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중대선거구제를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의견도 엇갈린다. 중대선거구제 도입이 논의되는 가장 큰 이유는 한국 정치에 고착화된 양당제를 깨뜨릴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선거에서 보다 다양한 민심을 반영함과 동시에 뿌리 깊은 진영 논리와 지역 갈등에서 벗어날 새 지평을 열 수 있다는 것이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양대 진영 싸움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우리나라 정치가 정상화되거나 협치·상생하기가 어렵다”며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통해 최소한 제대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만큼의 소수 정당 의원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형평성 문제 등 중대선거구제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선거에서 최다 득표자와 이보다 훨씬 적은 표를 얻은 후보가 똑같이 하나의 의석을 가져간다면 오히려 민의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어떤 사람은 5만표를 받아서 국회의원이 되고, 어떤 사람은 1만표 받아서 된다면 이 표의 등가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며 “비용 문제나 계파 정치 우려 등 부작용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꼭 중대선거구제가 아니라도 민의를 더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여러 비례대표제가 있다”면서 “진정으로 양대 정당 기득권을 깨려면 다른 방식들을 고민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대선거구제가 당장 내년 총선부터 도입되기는 어렵다는 것이 중론이다. 내년 총선 선거구 획정의 법정 기한은 오는 4월 10일까지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정치인들이 촉박한 기한 내에 공감대를 형성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조 교수는 “아직은 대다수 의원이 기득권 포기를 못한다”고 지적했고, 박 교수도 “실제로 중대선거구제가 시행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양당의 내부 반대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성영 기자 ps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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