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주인이 세입자에 "매달 50만원 드릴게요"…전셋값 폭락 진풍경

2023. 1. 14.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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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서울의 한 부동산 중개업소에 붙은 매물 정보. 월세 비중이 급증하고 있다. 연합뉴스
#경기도 분당의 한 아파트에 7년째 거주하고 있는 김진화(42)씨 가족은 같은 아파트 단지의 다른 동으로 최근 이사했다. 원래는 전세살이를 하던 김씨 가족의 이번 선택은 보증금 2000만원에 월세 250만원짜리 매물이었다. 김씨는 “확 오른 금리로 대출 이자 부담이 커진 요즘 같은 상황에선 수억원짜리 전세보다 200만원대 월세가 오히려 저렴하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서울 은평구에 자가(自家)를 둔 임대인 방모(65)씨는 지난해 말 세입자와 전세 갱신 계약을 하면서 보증금을 5000만원 깎아 줬다. 세입자가 인근 주택 전셋값의 가파른 하락세를 이유로 이를 요구했는데, 공인중개사 사무소에 물어보니 “시장 상황을 볼 때 세입자를 내보내고 새로 받으려면 전세 보증금을 기존보다 7000만~8000만원은 낮춰야 할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와서다. 방씨는 “차라리 월세 매물로 전환해서 새 세입자를 찾는 편이 나았겠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고 토로했다.

100만원 이상 고액 월세 5년 새 4배

임대인과 임차인의 ‘윈-윈’(win-win)을 이끄는 제도로 기능하던 전세가 고금리에 양쪽 모두로부터 외면되면서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이제 실익이 거의 없는데 그렇다고 장점이 많던 제도였음을 무시하면서까지 포기하기는 힘든 계륵(鷄肋)이 됐다는 얘기마저 집주인들 사이에 나온다. 계륵이 된 전세 대신 월세가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서울시(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임대차 시장에서 아파트의 전세 비중은 57.5%로 2년 전인 2020년(68.6%)보다 크게 낮아졌다. 반면 월세 비중은 42.5%로 2020년(31.4%) 대비 10%포인트 넘게 높아져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월세 비율의 변화만 있는 게 아니다. 전세 거래량 자체가 확 줄었다. 지난해 서울 주택 전세 거래량은 25만8529건으로 2021년 대비 7.7% 급감했다. 이런 거래 절벽에 일각에선 ‘전세 소멸론’까지 제기한다. 그사이 월세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면서 전세를 대체하고 있다. 월세의 높은 인기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100만원 이상의 고액 월세 거래량은 지난해 8만812건에 달했다(전국 아파트 기준, 경제만랩 집계). 2017년 2만4015건에서 5년 사이 4배 가까이 증가한 것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전세는 사실상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인도나 볼리비아에 극히 미미한 비율로 존재) 제도다. 그 역사도 100년을 훌쩍 넘길 만큼 깊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경성(지금의 서울) 인구가 급증하면서 전세 제도가 태동했는데, 한 일본인 학자가 1900년대 들어 “전세는 조선의 경성에서 주로 행해지는 가옥 임대차 관습”으로 소개한 기록이 있다. 이런 전세는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을 할 때까지 버팀목 역할을 하는 ‘주거 사다리’로, 또 목돈 마련을 위한 서민금융 수단으로 순기능을 한 측면이 있다. 최원철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특임교수는 “전세 제도는 서민들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룰 때까지 주거 안정을 유지하게 돕는 순기능을 가졌다”고 말했다. 전세 소멸이 대세인지, 아니면 일시적 현상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하지만 예전만큼 전세가 월세에 비해 압도적으로 선호되지는 못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런 경향은 목돈 마련이 쉽지 않은 젊은 세대로 내려갈수록 두드러진다.

고금리에 따른 주택 매매가 하락과 전세 수요 급감이 겹치면서 전셋값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시장에서는 갖가지 진풍경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 아파트 전셋값은 11월까지 2021년 말보다 5.23% 하락했다. 이는 해당 통계가 처음 나온 2003년 이래로 최대 하락폭이다. 같은 기간 전국 주택 매매 가격 변동률(-4.79%)보다도 하락세가 두드러졌다. 그러면서 이른바 ‘역(逆)전세난’도 심화할 기미를 보인다. 역전세난은 전셋값이 기존 계약 때보다 하락해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제대로 돌려주기 어려워진 상황을 가리킨다.

보증금 못 돌려주는 ‘깡통전세’ 급증 우려

실제로 전세 갱신 계약 때 보증금을 종전보다 낮추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3분기엔 4.6%였던 감액 갱신 계약 비율이 10~11월 들어 13.1%로 3배가량 치솟았다(수도권 기준, 집토스 집계). 경기 지역 아파트의 감액 갱신 계약 비율은 23.1%나 됐다. 진태인 집토스 아파트중개팀장은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월세 전환이 가속화하고 있고, 전세 퇴거 자금 대출의 이자 부담이 커져서 보증금 반환이 어려울까봐 발을 동동 구르는 집주인이 급증하고 있다”며 “기존 세입자와 감액 갱신 계약을 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러다 보니 시장에선 불과 1~2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각종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시중의 전셋값 급락으로 보증금 차액을 돌려주지 못하게 된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전세금 대출 이자를 따로 지원하는 경우가 급증한 게 대표적이다. 지난달 네이버 ‘부동산스터디’ 카페에선 한 회원이 “집주인으로부터 ‘역월세’ 제안을 받았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냐”고 묻자 댓글 등으로 비슷한 경험담이 쏟아졌다. 집주인들이 하락한 전셋값에 따른 보증금 차액만큼 세입자에게 월세 이자를 지급하는 게 역월세다. 예컨대 전셋값이 1억원 하락했는데 집주인이 당장은 그만큼을 세입자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 세입자가 계속 거주하는 조건으로 1억원에 대한 연간 이자를 매월 40만~50만원대씩 주는 것이다.

역전세난을 우려한 세입자가 집주인의 자금력 등을 꼼꼼히 따지고 가려서 이사하기 위한 ‘집주인 면접’도 유행하고 있다. 전세 매물을 내놓은 전모(53)씨는 얼마 전 공인중개사로부터 당혹스러운 연락을 받았다. 계약에 관심을 보인 예비 세입자가 “집주인의 재무 상태를 미리 확인하고 싶다”며 회사 재직 증명서와 국세·지방세 등의 완납 증명서 제출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후 계약에 성공한 전씨는 “마치 입사 시험 면접관처럼 나를 깐깐하게 대하는 태도에 조금 불쾌감이 들었다”면서도 “매물을 내놓은 뒤 가격을 수차례 낮추고도 서너 달이 걸릴 만큼 어렵게 나타난 세입자라 순순히 해 달라는 대로 했다”고 말했다. 전씨 같은 집주인들 입장에선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1~2년 전만 해도 거꾸로 집주인이 몰려든 세입자 후보 가운데 하나를 추리는 ‘세입자 면접’이 대세였기 때문이다.

한편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라 보장된 세입자 권리인, 2년 전세 계약 기간을 2년 더 연장할 수 있는 계약갱신청구권을 아예 행사하지 않고 자진 포기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경남 지역 공인중개사 김명숙(57)씨는 “2년 전보다 전셋값이 많이 내려간 상황이라 세입자들이 계약갱신청구권을 써서 감액 갱신 계약을 하는 것보다, (계약갱신청구권을) 안 쓰고 다른 전셋집으로 갈아타는 편이 금전적으로 훨씬 이득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집주인이 보증금 대출 이자 지원도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서울 주택의 갱신 계약 건 가운데 세입자가 계약갱신청구권을 쓴 경우는 5171건으로 41.4%였다. 이는 지난해 1월 59.0% 대비 17.6%포인트나 줄어든 수치다. 10월에도 46.6%로 4분기 들어 비중이 크게 떨어지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당초 시장에선 2020년 임대차보호법 도입 이후 전세 계약 만기가 도래하는 시점인 지난해 여름부터 전셋값이 다시 급등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이는 금리 인상과 부동산 경기 침체 여파로 전셋값이 정반대로 급락하면서 현실로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계약갱신청구권을 쓰는 사례만 계속 줄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진풍경들은 시장에서 역전세난이 당분간 계속될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고 보고 있음을 의미한다. 2020년 5월 0.50%, 2021년 11월 1.00%였던 국내 기준금리는 지난해부터 미국 등 글로벌 금리 인상 가속에 발맞춰 급격히 올라 올해 들어 3.50%까지 높아졌다. 올해도 한국은행이 긴축의 고삐를 늦추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집값 하락과 전셋값 하락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문제는 그러면서 역전세난 심화로 보증금이 떼이는 ‘전세 사기’에 대한 걱정을 해야 하는 세입자가 급증하는 한편, ‘깡통전세’(집값이 전세 보증금에 미치지 못하는 집)의 속출로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제대로 못 주는 집주인까지 급증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데 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깡통전세는 대출을 통해 구매한 주택의 매매 가격이 하락해 전세금과 대출금을 합한 금액이 매매 가격보다 커지면서 임대인에게 이익이 없어지는 경우다. 그런데 한국주택금융공사 주택금융연구원에 따르면 향후 2년간 전국 주택 매매가격지수가 0~10% 하락할 경우 깡통 전세 비중이 7.5%가 되고, 매매가격지수가 10~20% 하락하면 깡통전세는 12.5%에 달할 것으로 예측된다. 향후 2년간 집값이 10~20% 하락하면 올해 하반기 계약 만기가 도래하는 전국의 전세 8건 중의 1건은 매매 가격이 보증금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 이 기간 임대차 시장에서 전세 보증금 반환 관련 분쟁도 빈번할 수밖에 없다. 이미 지난해 1~11월 서울의 ‘임차권등기명령’ 신청 건수는 3700여 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26% 증가한 역대 최대치를 기록할 만큼 위험 수위에 올라 있다. 임차권등기명령은 전·월세 계약 만료 시점에 세입자가 보증금을 받지 못할 경우 법원에 신청해 받아낼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향후 최소 2년간 집값과 함께 전셋값이 더 하락할 가능성이 큰 만큼, 정부가 세입자와 집주인 양쪽 모두를 위한 임대차 시장의 연착륙 유도에 절실히 나서야 하는 시점이라고 강조한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현재 전셋값 하락률이 매매 가격 하락률보다도 가파르고, 내년 입주 물량(공급량)이 많은 데다 금리 인상 악재까지 공존하고 있다”며 “전세 사기 빈도가 높을 위험성이 커진 상황”이라고 우려했다. 서진형 공정주택포럼 공동대표(경인여대 MD상품기획비즈니스학과 교수)도 “역전세난이 지속할 경우 임대인과 임차인 간의 사회적 갈등 격화뿐 아니라 임차인의 새로운 전세 계약 또는 이사 관련 계획이 틀어지는 등, 법적으로 보장된 거주 이전의 자유가 제한되는 부작용이 더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서 대표는 “임차인이 원하는 때 보증금을 돌려받고 이사할 수 있도록 임대인에 대한 금융 지원을 강화하는 등의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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