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맥주 한 잔이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기자]
▲ 흰 수도복을 입은 트라피스트 수도사들 |
ⓒ 트라피스트회 |
새벽 3시, 공기 소리도 들릴 것 같은 고요함이 수도원을 감싸고 있다. 삭발한 남자들이 소박한 십자가 앞 낡은 의자에 앉아 기도와 찬송을 하고 있다. 아침 식사는 시리얼 한 줌과 빵 한 조각, 몸에 걸친 건 흰색 수도복과 낡은 신발뿐이지만 침묵 속에 반짝이는 눈빛은 누구보다 맑다. 세상과 차단된 공간에서 기도와 침묵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이들은 '백의 수도사' 트라피스트(Trappist)다.
트라피스트회는 성 베네딕트의 규율을 엄격하게 따르는 가톨릭 수도회(Order of Cistercians of the Strict Observance)를 의미한다. 480년 이탈리아 누르시아에서 태어난 성 베네딕트는 유럽 수도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가톨릭 수호성인이다.
은수자의 삶을 살던 그는 525년 로마와 나폴리 사이에 있는 몬테카시오 언덕에 최초의 수도원을 세우고 '베네딕트 규칙서'를 만든다. 성 베네딕트는 이 규칙서를 통해 수도사가 지켜야 할 가치로서 기도, 평화, 청빈 그리고 노동을 천명했다.
중세 초기 베네딕트의 규율을 따르는 수도원들이 생기며 '베네딕도회'가 탄생한다. 중앙집권적 구조에서 벗어나 연합체의 성격을 띤 베네딕도회는 중세를 지나며 크게 성장했지만 점차 세속화되기 시작했다. 이런 세속화를 우려한 몰레즘 수도원의 로베르, 알베릭, 스테파노 하딩은 베네딕트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했고 1098년 프랑스 시토에 새로운 수도원을 세웠다.
시토 수도원에서 이들은 외부와 고립된 생활을 하며 기도와 노동에 집중했다. '기도하고 일하라'는 베네딕트의 규율에 따라 청빈하고 단순한 삶으로 하나님에게 다가가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시토회는 1119년 교황 갈리도스 2세에 의해 인정된 '사랑의 헌장'을 통해 자신들만의 규정을 제정했으며 흰색 수도복과 검은색 스카풀라레를 입으며 베네딕도회와 구분했다.
시토회는 1112년 베르나르도가 수도원장이 된 후 시토회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며 번성했다. 그의 활약으로 시토회의 명성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13세기 중엽에는 무려 680여 개의 대수도원이 존재했다. 그러나 17세기 들어 시토회는 문제를 겪기 시작한다. 세속에 젖어가는 수백 개의 수도원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규율은 이완되었고 노동을 포기하는 수도사들도 속출했다. 역사는 반복되는 법, 500년 전 베네딕도회에 그러했듯이 낡은 시토회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중심에는 프랑스 라 트라페(La Trappe) 수도원장인 '아르망 장 르 부틸리에'가 있었다.
1664년 아르망 장 르 부틸리에는 기도, 침묵, 무소유, 금욕, 고립 그리고 노동이라는 베네딕트의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하루를 기도와 명상으로 시작하고 침묵과 노동을 중시했으며 베네딕트 가르침에 따라 고기를 먹지 않고 최소한의 것만 소유하는 삶을 영위했다. 그리고 '라 트라페'의 이름을 따 자신들을 '트라피스트'라고 불렀다.
한때 프랑스 대혁명으로 큰 위기를 겪은 트라피스트회는 1892년 베네딕트 규율을 엄격하게 따르는 시토회로 독립한 후 지금은 대한민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 168개의 수도원이 존재한다.
▲ ATP 라벨 |
ⓒ ITP |
트라피스트라는 이름이 붙은 상품들은 항상 수요가 공급보다 많다. 하지만 트라피스트회는 성장을 추구하지 않는다. 항상 수도원 운영에 도움이 될 정도만 생산하며 덕분에 트라피스트 상품들은 프리미엄 가치를 가진다. 맥주는 그중 가장 인기가 많으면서 논란을 일으키는 존재다.
맥주는 로마 시대부터 수도원에서 만들어 온 음료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과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많은 수도원이 사라지면서 수도원 맥주도 줄어들었다. 19세기 말 수도원의 이름을 붙이거나 수도원 레시피를 이용한 상업 맥주들이 등장했다.
예를 들어 파울라너, 바이헨슈파텐, 프란치스카너 같은 상업 맥주들과 레페나 아플리겜처럼 수도원 레시피로 일반 양조장에서 생산되는 맥주들이 수도원의 이름을 등에 업고 나타난 것이다. 특히 후자는 '애비비어'(abbey bier)라는 카테고리로 시장에 출시되어 소비자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은 자신들의 가치가 혼탁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며 1998년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ITA)를 결성했다. ITA의 일차적인 목적은 트라피스트 상표(Trappist®)가 불법 혹은 상업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아 원산지와 소비자를 보호하는 것에 있었다. 또한 수도원들이 원래 취지에서 벗어나 과도한 경제적 이득을 취하거나 잘못된 생산 방식을 추구하는지 감시하려는 취지도 있었다.
ITA는 여기에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는 적극적인 방법도 도입했다. ITA의 엄격한 기준을 인증하는 ATP(Authentic Trappist Product) 라벨을 제작한 것이다. 육각형 ATP 라벨은 다음과 같은 가이드라인을 충족해야만 받을 수 있다. 우선 모든 제품은 반드시 수도원 내에서 만들어져야 하며 모든 수도사 혹은 수녀들의 관리 감독을 받아야 한다.
판매 수익은 수도원의 생계 혹은 트라피스트의 목적이나 기부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또한 ATP 라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5년마다 재평가를 받아야 하며 만약 탈락하면 지체 없이 인증은 취소된다.
보석 같은 트라피스트 맥주들
트라피스트 맥주 상표가 붙은 맥주 중 모든 맥주가 ATP 라벨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현재 ITA에 소속된 19개의 수도원 중에 트라피스트 맥주를 생산하는 곳은 13개이며, 이 가운데 육각형 ATP 인증을 받은 트라피스트 맥주는 시메이, 오르발, 로슈포르, 베스트말레, 베스트블레테렌, 라 트라페, 트레 폰타네, 틴트 미도우, 엥겔스만, 준데르트 총 10개뿐이다.
ATP 인증 트라피스트 맥주는 원산지뿐만 아니라 트라피스트 공동체적 가치와 품질을 지니고 있음이 보증된다. 트라피스트 맥주는 빛나는 맥주들로 가득하다.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꼭 마셔봐야 할 4개의 트라피스트 맥주를 공개한다.
▲ 라 트라페 콰드루펠 |
ⓒ 윤한샘 |
다양한 맥주 중 1991년 태어난 '라 트라페 콰드루펠'은 코닝쇼벤의 명성을 드높인 맥주다. 콰드루펠은 10%의 알코올, 불투명한 브라운 색, 농축된 검은 과실과 수지 같은 향 그리고 묵직한 바디를 지닌 에일이다. 겨울용으로 생산됐지만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치며 대표적인 벨기에 맥주 스타일로 자리를 잡았다. 맥주 속에 흐르는 기품이 무엇인지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이왕이면 콰드루펠의 원조, 라 트라페라면 더할 나위 없다.
▲ 베스트말레 두벨 |
ⓒ 윤한샘 |
▲ 베스트말레 트리펠 |
ⓒ 윤한샘 |
▲ 베스트블레테렌12 |
ⓒ 윤한샘 |
베스트블레테렌 12는 10.2% 알코올과 불투명한 마호가니 색을 가진 콰드루펠이다. 이 맥주는 트라피스트 맥주의 마스터피스라 할 수 있다. 건포도, 블랙베리, 섬세한 감초, 바이올렛, 구운 빵과 같은 향은 묵직한 바디 속에서 섬세한 결을 만든다.
알코올은 뚜렷하나 지나치지 않고 쓴맛과 단맛은 도드라지나 균형감을 이룬다. 분명한 자기 색깔은 절제와 함께 기품이 되어 돌아온다. 가격은 사악하지만 베스트블레테렌 12의 유혹을 이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장담한다.
자본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1000년 전 성인의 말씀을 묵묵히 실행하고 있는 트라피스트 수도사들은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다. 이들은 노동하지만 소유하지 않는다. 가난은 수도사들에게 빛나는 가치다. 필요한 만큼 생산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위해 나눌 뿐이다. 그래서 트라피스트 맥주는 세상 어떤 맥주보다 선하다.
맥주가 공동체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있음을, 맥주 한 잔으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음을, 백의 수도사들은 보여준다. 기도와 노동이 부족한 이들이여, 맥주로 회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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