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사과 '끝없는 반복' 흥국생명 배구, 진짜 문제는
[박진철 기자]
▲ ?흥국생명 선수들, 2022-2023시즌 V리그 |
ⓒ 박진철 기자 |
점입가경이다. 흥국생명 배구단 고위층의 선수 기용·로테이션 개입과 권순찬 감독 경질 사태가 황당한 사건이 계속 추가되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흥국생명 구단은 지난 2일 권순찬(48) 감독을 전격 경질했다. 그리고 6일 후임 감독으로 김기중(48) 감독 선임을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김 감독은 10일 최종 고사했다. 그는 이날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지금 상황에서 흥국생명을 맡는다면 수많은 오해와 비난이 쏟아질 것이 자명하다"고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흥국생명은 지난 8일부터 김대경(36) 코치가 지난 5일 단 한 번 감독 대행을 하고 팀을 떠난 이영수(45) 전 수석코치에 이어 '감독 대행의 대행'으로 감독직을 수행하고 있다. 흥국생명은 현재 팀에 남아 있는 코치가 김연경(35) 선수보다 1살 많은 김대경 감독 대행과 4살 어린 최지완(31) 코치 2명뿐이다.
사태가 커지자, 흥국생명은 10일 구단주인 임형준(61) 흥국생명 대표이사와 신용준 신임 배구단 단장 명의로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앞으로 경기운영에 대한 구단의 개입을 철저히 봉쇄하고, 감독의 고유 권한을 전적으로 존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기운영 개입 시인·사과... 말뿐인 재발 방지
그러나 사과문 발표 이후에도 배구계와 배구팬은 물론, 언론 매체로부터 흥국생명 고위층을 향한 비판이 계속되고 있다. 한참 뒤늦은 사과인 데다, 재발 방지를 위한 강력한 처방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사과문 자체가 책임성과 실행력이 의문시되는 인사들 명의로 발표됐다는 점도 문제였다. 특히 이번 사태를 일으킨 핵심 주역인 김여일 전 흥국생명 배구단 단장은 아직 어떤 공식적인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또한 흥국생명 배구단의 모기업 태광그룹의 총수인 이호진(61)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직접 나서지 않았다는 점도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유이다.
후임 감독 선임 과정도 큰 패착이었다. 엄청난 상처를 입은 선수들이 수긍할 수 있는 인물인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했어야 했다. 그러나 흥국생명 구단은 선수들은 안중에도 없고, 마치 누군가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처럼 후임 감독 선임을 속전속결로 발표했다. 그러나 여론은 더욱 악화됐고 후임 감독까지 5일 만에 고사하면서 더 이상 사태를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사과문 발표로 백기를 든 모양새가 됐다.
팬들 요구·비판, 이중적 잣대 취사선택
흥국생명 구단은 초기 대응부터 사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욱 악화시켰다. 권순찬 전 감독과 선수들이 강력히 문제를 제기한 건, '고위층의 선수 기용 오더(지령)' 때문이었다.
그런데 신용준 신임 단장은 지난 5일 "선수 기용 문제가 아니었다. 유튜브 등에서 팬들이 선수 로테이션 관련해서 변화 요구가 있었다. 그런 부분에 대해 김여일 전 단장과 권순찬 전 감독이 서로 의견이 대립이 많았다. 그래서 임형준 구단주가 동반 사퇴시켰다"고 해명했다. 이후 언론 매체들은 신 단장과 흥국생명 구단을 향해 '황당 해명', '거짓말투성이', '횡설수설', '엉망진창' 등으로 헤드라인을 뽑으며 맹비난을 쏟아냈다.
사실 신 단장이 해명하면서 끌어들인 '팬들의 요구와 비판'도 유불리에 따라 이중적인 잣대로 취사선택한 인상을 준다. 팬들이 권순찬 전 감독을 비판했던 건, 제대로 된 선수 기용과 더 나은 로테이션으로 승리해 달라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강팀과 경기에서 무리하게 젊은 선수를 기용했다가 허무하게 세트를 내주거나 경기를 패한 부분에 대해 팬들의 비난이 엄청났다.
문제는 흥국생명 고위층의 오더가 승패와 상관없이 젊은 선수들을 더 많이 기용하라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는 점이다. 이는 팬들의 요구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런데도 신 단장은 그런 부분은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들에게 유리해 보이는 팬들의 로테이션 비판 대목만 가지고, 마치 그것이 감독 경질 사유의 전부인 양 말했다. 그런데 이런 해명은 전술적 문제에 대해 말을 듣지 않는다고 1위 경쟁 중인 감독을 느닷없이 경질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흥국생명 고위층이 일을 풀어가는 방식이 극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이라는 걸 자인한 꼴이다. 한때 권순찬 감독을 비판했던 팬들마저 감독 경질 사태에 분노로 돌아선 것도 그런 이유들 때문이다.
물론 젊은 선수 육성 방침이 잘못된 건 아니다. 그러나 때가 있고, 단계가 있다. 또한 어린 선수들 육성에는 베테랑 선수들의 조언과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고위층 압력에 의한 강제 투입은 이 유기적 관계를 일거에 무너뜨린다. 그래서 모두에게 민폐다.
▲ ?배구팬들, 흥국생명 모기업 최고위층 향한 '트럭 시위' (2023.1.9, 흥국생명 본사) |
ⓒ ?여자배구행복기원단 |
흥국생명 배구단 사태가 해결책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혼돈 상태가 계속되고 있는 이유는 따지고 보면 단 한 가지다. 구단이 발표한 사과문과 재발 방지 약속에 대해 선수는 물론 배구계, 언론 매체, 팬들이 거의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또한 구단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그동안 대형 사고와 그에 따른 사과가 너무 많이 반복됐다. 2005년 V리그 출범 이후 18년 동안 누적된 고위층의 비상식적인 구단 운영 행태가 곪을 대로 곪아서 결국 폭발한 것이다.
흥국생명 구단은 2005시즌에 다음해 신인 드래프트에 나오는 김연경을 쟁취하기 위해 '고의 패배(탱킹)'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2013-2014년에 김연경의 해외 리그 활동 지속 여부를 놓고 험악한 이적 분쟁 소동을 벌였다. 당시 흥국생명 고위층은 김연경의 선수 생활을 금지시키겠다는 기세로 거세게 몰아붙였다. 결국 김연경을 구제해준 건, 당시 소속팀이었던 페네르바체와 국제배구연맹(FIVB)이었다.
팬들, 상처 입은 선수들에게 '뜨거운 감동' 선사
지난 2021년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의 학폭 사태 때도 흥국생명 구단은 부적절한 처신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이들의 V리그 복귀를 위해 2021년 6월 선수 등록 마감일 직전까지 감싸다가 엄청난 비난 여론에 마지못해 선수 등록을 포기했다. 그리고 공식 사과문까지 발표했다. 당시 흥국생명 배구단을 총괄했던 단장이 바로 김여일 전 단장이었다.
그런데 흥국생명 구단은 쌍둥이 사태 이후 물러났던 김 전 단장을 지난해 5월 다시 배구단 단장으로 복귀시켰다. 그리고 이번에 김 전 단장은 권순찬 감독 경질과 선수 기용 개입 오더의 핵심 주역으로 떠올랐다.
흥국생명 팀에서 벌어진 수많은 사건 사고들을 돌아보면, 일관되게 관통하는 대목이 있다. 프로구단을 그룹 최고위층의 사유물처럼 마음대로 운영해도 되고, 감독과 선수들은 굴종하고 따라야 한다는 마인드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한편, 이번 흥국생명 배구단 사태 와중에 아이러니하게도 큰 울림과 감동을 준 사건도 발생했다. 바로 팬들의 반응이다. 팬들은 여전히 흥국생명 고위층을 향해서 응원 도구·구호 변경, 트럭 시위 등으로 항의와 경고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프로다운 모습을 보여준 김연경을 비롯한 흥국생명 선수들을 향해서는 경기장을 더욱 많이 찾아가고, 자체 제작한 '행복 배구' 클래퍼를 들고 뜨거운 응원을 보내고 있다.
실제로 11일 흥국생명 홈구장에서 열린 흥국생명-현대건설 경기는 평일임에도 4509명의 관중이 몰렸다. 한국배구연맹(KOVO) 관계자에 따르면, 이날 경기의 케이블TV 시청률도 1.74%(전국 케이블가구 기준)로 올 시즌 현재까지 남녀 배구를 통틀어 1위를 기록했다. 또한 15일 광주광역시에서 열리는 페퍼저축은행-흥국생명 경기도 3층 좌석까지 '추가 개방'했는데도 벌써 티켓이 매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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