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병에서 출발한 주인공의 기행, 이런 불쾌한 경험은 처음
[김상목 기자]
'해시태그' + '시그네', 흔히 '#'으로 통용되는 검색기능을 부여한 온라인 표식과 주인공의 인명이 결합된 제목. 아직은 국내에서 쉽게 접하기 힘든 북유럽에서 온 영화다. 감독도, 주연배우 이름도 생소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작년에 꽤 흥미롭게 봤던, 젊은 여성의 사랑과 성장 스토리를 인상적으로 그려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제작한 영화사 작품이라기에 관심이 갔다. 해당 작품과 통하는 구석이 있어 뵈는 내용도 호감이 갔다. 게다가 블랙코미디가 깃든 로맨스 물이라는 홍보문구에 큰 긴장 없이 편하게 봐도 되겠다 안심하고 영화를 관람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시간 반 남짓 시간이 지났다.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대체 내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혼란한 순간이 수시로 발생했다. 혼돈이 휘몰아치고 강렬하게 치밀어오는 욕지기 때문에 속이 편하지 못했다. 다종다양한 불편한 감정들이 몰려들었다. 그래도 꾹 참고 마지막까지 영화를 다 보게 되었다. 그 끝에서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추리해야 하는 시간이 닥치기 시작했다.
▲ "해시태그 시그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판씨네마㈜ |
시그네는 남자친구 토마스와 함께 살면서 카페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이다. 둘은 북유럽 스타일의 전형 같은 제법 훤한 커플이다. 남자친구 토마스는 예술가로 활동하는 중이라 한다. 홍보카피에서 거듭 강조되는 제작사의 꽤 평판 좋았던 전작과 얼마나 겹쳐질까 상상하며 화면을 응시해본다. 그런데 곧 기괴하게 이야기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시그네의 생일기념으로 둘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 중이다. 토마스는 호기 넘치게 한 병에 2300달러나 되는 고급와인을 주문하면서 로맨틱한 이벤트를 벌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젊은 예술가가 사랑하는 애인에게 적당히 치기어린 축하를 치르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곧 토마스는 그 비싼 와인을 들고 줄행랑을 친다. 레스토랑 직원이 그를 뒤쫓는다. 시그네는 그 광경을 가게 바깥에서 심드렁하게 지켜본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토마스는 공신력 있는 기관의 후원으로 자신의 작품 전시회를 시내 갤러리에서 열게 된다. 명예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에 그는 도취된 듯 보인다.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잡지와 인터뷰도 가진다. 시그네가 무어라 그에게 말을 걸거나 함께 있을 때면 관심받기를 바라는 기색이 역력하지만 토마스는 전시회 준비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다. 그런 남자친구 때문에 시그네의 표정은 서서히 어두워진다. 토마스는 시그네와의 연인 관계를 구태여 드러내지도, 전시회 개최 축하파티에서도 여자친구를 적극적으로 소개하지도 않는다. 시그네는 유식하고 명망 높은 손님들 사이에서 주목받고자 모종의 사고를 치기에 이른다.
시그네가 일하는 카페 근처에서 맹견에 물린 여성이 들어와 쓰러진다. 시그네는 전신에 피를 뒤집어쓰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구호한다. 하지만 카페 안팎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온통 주변에 가득한데도 시그네 외엔 모두 휴대전화로 촬영을 하거나 웅성대며 구경만 할 뿐 누구 하나 나서지 않는다. 시그네는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하필 카페 근무를 위해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고 있던 바람에) 피로 칠갑을 한 채 귀가한다. 사람들은 지나가다 무심코 시그네를 보고 깜짝 놀란다. 전시회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던 토마스도 집에 도착한 시그네를 보고 화들짝 놀라 오랜만에 자신의 여자친구를 걱정해준다.
▲ "해시태그 시그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판씨네마㈜ |
시그네는 토마스와 주변 지인들의 관심과 염려가 간절히 고프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예술가 행세하며 자기 명성 쌓는 데에만 몰두하는 중이다(하지만 그가 어떤 창작행위를 하는 건 통 눈에 보이지 않는다. 토마스가 행하는 예술의 실체는 후반에 드러난다). 그저 평범한 카페 직원인 시그네가 사람들에게 주목받기란 의외로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래서 시그네는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기괴한 궁리를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나르시시즘에 물들어가는 시그네는 점점 자기연민과 허언증에 빠져든다. 평범하기에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 못면 흔히 다른 이들은 이미지 변신에 도전하게 마련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성형이나 운동에 중독된 이들을 종종 듣고 보게 되는 것처럼. 하지만 시그네는 그런 비교적 익숙한 방식이 아닌 자기학대, 아니 자기파괴를 향해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감행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은 실로 당혹스럽기 짝이 없을 지경이다.
단순한 꾀병에서 출발한 시그네의 기행은 점점 과격해진다. 그는 스스로 자기 건강을 해치고 외모를 일그러뜨리는 방향으로 마냥 흘러간다. 자신이 벌인 거짓 행각이 들통이 날까봐 두려워 제대로 된 의료서비스를 거부했기에 시그네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기만 한다. 하지만 그는 흉측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육체를 확인하고 두려움에 떨면서도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전혀 자제하지 못한다. 어찌 되었건 토마스를 비롯한 주변의 관심과 주목을 얻어내는 데에는 성공했기 때문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튀어 보이는 건 덤이다.
'정체불명의 질병에 걸려' (영화 시작에선) 상상도 못하던 흉해진 외모로 맨얼굴을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시그네의 행태는 무척이나 기괴하다. 하지만 '꿈보다 해몽' 같은 과정을 통해 시그네는 사회적 소수자와 정치적 올바름 문제를 중시하는 언론이나 브랜드의 관심을 끌어내는데 성공한다. 시그네는 온갖 궁리를 통해 타인들의 동정심을 얻어내고 이를 발판삼아 유명해지려 시도한다. 하지만 그런 시그네의 꿈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결국 스스로의 실책으로 그의 모래성은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대체 이 영화를 만든 이들은 시그네의 기이한 모험을 어디까지 끌고 가 어떻게 마무리하려는 걸까? 슬슬 영화 속 주인공이 안쓰러워질 정도다.
하지만 곧잘 그런 염려가 들다가도 반성이나 성찰과는 담을 쌓은 듯 끝까지 치닫는 시그네의 뻔뻔하고 도무지 생각 같은 건 없어 뵈는 행각에 짜증을 넘어 혐오까지 불쑥 치밀어 오르곤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시그네가 외모가 일그러지고 병치레를 하는데도 오히려 더 헌신하는 것 같던 남자친구 토마스도 평범한 인물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였다. 그가 시그네가 망가지면 망가질수록 더 헌신하는 것처럼 보였던 태도의 배후는 영 엉뚱한 속셈이었다. 참말로 '끼리끼리 만났구나!' 하는 탄식이 몰려든다. 결국 시그네가 오직 자신만 봐 주기를 갈구했던 남자친구와는 최악의 궁합이었던 셈이다.
▲ "해시태그 시그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판씨네마㈜ |
그런데 처음엔 대체 왜 저러고 사는지 한심한 시선으로 보게 되던 그들이 (심하게 극단적 유형이기는 하지만) 은근히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 접하곤 하는 SNS 유머 속 '진상'이나 '관종' 캐릭터들과 어느 순간부터 겹쳐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오싹해지는 기분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그 안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과 사건이라는 전제를 가질 때 편안하게 화면 속 대상이 망가지는 장면을 즐길 수 있다. 그런 전제만 갖춰진다면, 화면 속에서 찍고 자르고 썰어대면서 창자로 줄넘기를 하건 말건 (비위만 괜찮다면) 별 상관이 없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마치 실제 상황처럼 이야기가 화면을 찢고 나오기 시작하면 상황이 급변하게 된다. 나 자신이나 주변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인식되는 순간부터 엄습하는 불안은 호기심을 순식간에 능가해버린다.
시그네는 여러 사건에 휘말리거나 자기 스스로 위기를 조장하곤 한다. 주변의 인물들은 시그네를 이용하기도 하고 멀찍이 떨어져 염려하는 등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하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시그네를 위해 자기 손해를 각오하거나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는다. 결국 누군가의 위로가 정말 필요할 때 그의 곁에는 온전한 친구도 이웃도 가족도 없는 것이다. 시그네가 영화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오직 선의와 양심에 기반을 두고 행동했던 응급구호 때 주변의 숱한 이들이 보였던 행태처럼 말이다. 다시 떠올려본 해당 장면은 무척이나 징후적인 복선이었다. 시그네는 살아오면서 내내 그런 환경에 익숙해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주인공에게 실제로 도움을 주거나 적어도 이용하려는 시도는 않던 존재들은 오히려 시그네보다 더 열악한 조건을 갖고 있거나, 그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되는 이들이라는 점도 이채롭다.
시그네가 망가지는 과정이 주요하게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지만, 외모가 망가지지 않을 뿐 남자친구인 토마스가 겪게 되는 흥망성쇠도 은근히 시선을 끌 것이다. 토마스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 과잉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명예와 그에 따른 대중의 관심을 즐기려는 또 다른 '관종'에 가깝다. 그가 벌이는 소위 '예술적 실천'은 민폐 유튜버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창조하기 위해 뼈를 깎는 실천과 고민 대신에 (흔히 현대미술에 대한 비판처럼) 자신을 시대의 예술가로 포장하는데 안간힘을 쓴다. 하지만 실체가 받쳐주지 않는 토마스의 욕망은 바닥을 드러낼 운명이다. 그렇게 시그네와 토마스가 서로 수렁으로 상호작용하며 사이좋게 빠져 들어가는 광경은 순식간에 미디어와 sns의 과잉 속에서 떠올랐다 추락하며 명멸하는 수많은 '인플루언서' 혹은 '샐럽'들의 행태를 거울처럼 묘사하고 있다.
영화 속 대다수의 주변 인물들은 부질없는 동정이나 속에 감춰둔 자기연민 때문에 시그네와 이것저것 엉켰다가도 시그네가 폭주할 기색을 보이거나 감당이 안 될 것 같으면 금방 손절해버린다. 모두가 서로 연결된 것 같지만 실은 낯선 타인에 불과한 세계다. 가족도, 친구도, 공공기관도 예외가 아니다. 그 틈바구니에서 결국 시그네에게 마지막까지 손을 내미는 존재가 누구인지 영화 마지막에 확인하는 건 꽤 서늘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물론 시그네의 대책 없는 영화 속 행각과 그로 인한 끔찍한 파국은 거의 전적으로 그의 자업자득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동정이라곤 찾아보기 힘들어져버린, 차갑고 뒤틀린 현대사회에서 우리 각자가 시그네(와 토마스)처럼 순식간에 나락으로 추락하게 될 '경우의 수' 위험은 지뢰밭처럼 도처에 가득한 법이다. 그런 깨달음의 순간에 본 작품은 우리 시대에 관한 지독히 차가운 단면도로 변신할 테다.
▲ "해시태그 시그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판씨네마㈜ |
누군가에게 <해시태그 시그네>는 무척 불유쾌한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특히 시그네가 영화 속에서 이용하려 드는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냉소적 묘사는 영화를 만든 이들의 의도를 의심케 하는 시험의 찰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불편한 구석이 적지 않지만 딱히 없는 이야길 악의적으로 지어내지는 않는 수준이다. 큰 틀에서 보자면 그런 대의명분과 선민의식 이면에 감춰진 위선과 한계를 지적하는 데 가까운 터치다. 그런 상념들 때문에 종종 의문부호가 따라붙기는 해도, 각자의 호불호를 떠나 새해 초에 이렇게 묵직한 한방을 맞는 기분을 당하게 한 이 영화에 대한 궁금증이 솟아나는 건 당연지사다.
낯선 작품에 숨겨진 정보가 좀 더 있을까 싶어 크레디트 롤을 유심히 살피고 여기저기 검색도 해본다. 마침 이 영화의 미술을 맡은 건 백주대낮에 천연덕스럽게 공포영화를 연출해 짙은 인상을 남겼던 <미드소마> 팀이 담당했음을 확인했다. 해당 영화는 대부분의 공포영화 문법을 뒤집고 목가적인 북구의 풍광 속에서 온갖 잔혹도를 드러내는 걸로 악명이 자자한 작품이다. 그러고 보니 발랄한 척 하지만 은근히 수위가 높았던 특수 분장과 효과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대체 평화롭게만 보이는 북유럽 사람들은 어떤 경험을 겪으며 살았기에 저렇게 천연덕스러운 미친 짓을 하는 걸까 의문은 더 깊어가지만 말이다.
좀 더 이것저것 확인해본다. 촬영은 역시 눈부시면서도 적당히 몽환적인 톤으로 깊게 뇌리에 아로새겨졌던 <애프터 양> 팀이 맡았다고 한다. 시그네가 실제와 상상을 오가며 갈팡질팡하던 찰나들이 한층 더 선명해지는 기분이다. 의도적으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일그러뜨려 서로 뒤섞이게 만드는 심리 스릴러 연출은 이 유능한 스태프들의 덕을 많이 보았으리라 상상해본다. 거기에 제작자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를 맡아 성공적인 결실을 선보인 바 있다. 그런 정보를 습득하고 나니 <해시태그 시그네> 속 주인공이 영화사 오슬로 필름의 전작과는 정반대로 비틀어버린 이 영화의 마성이 한층 더 수긍되었다.
그렇게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주인공 '율리예'와는 정반대 캐릭터를 떠맡아 자기 파괴를 향해 안전벨트도 매지 않고 전속력으로 추락해가는 주인공 시그네의 서사가 완성된다. 이 지독한 뒤틀림을 표현하기 위해 제작자와 미술 팀, 촬영 팀 스태프들이 합심해 자신들의 성공적 전작들을 삼단합체 시켜놓으면 딱 나올법한 블랙유머와 공포효과의 잔칫상 같은 영화가 새해 초입에 도착해 버렸다. 큰일이다.
<작품정보>
해시태그 시그네 Sick of Myself, Syk Pike
2022|노르웨이, 스웨덴|언로맨틱 코미디
2023.01.11. 개봉|97분|15세 관람가
감독 및 각본 크리스토퍼 보글리
주연 크리스틴 쿠야트 소프(시그네 역), 아이릭 새더(토마스 역)
제작 안드레아 베렌트센 오트마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촬영 벤자민 로엡 <애프터 양>
미술 헨릭 스벤손 <미드소마>
수입 및 배급 판씨네마㈜
2022 75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초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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