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 협상 실패' 윤석열 정부의 황당한 발언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서민정 외교부 아태국장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 참석해 그간 국내 의견 수렴 및 대일 협의 경과를 설명하고 있다. |
ⓒ 유성호 |
12일 국회에서 열린 강제징용(강제동원) 공개토론회는 윤석열 정부의 대일 협상 실패를 드러냈다. 조현동 제1차관과 서민정 아시아태평양국장을 토론회에 내보낸 외교부는 전범기업 배상금을 받아내기가 사실상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2018년 대법원 선고에 따른 판결금의 지급을 거부하는 일본 기업들의 태도를 바꾸기 힘들다는 게 외교부의 판단이다. 일본 외무성과의 실무협상을 진행 중인 서민정 국장은 토론회 발제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양국 간 입장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피고기업의 판결금 지급을 이끌어내기는 사실상 어려운 점을 민관협의회 참석자 분들을 비롯해서 피해자 측에서도 알고 계신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가해자가 배상금 지급을 거부할 경우에 대비한 제도가 강제집행 절차에 따른 현금화다. 지금 징용 피해자들은 이 단계에 와 있다. 그런데 외교부는 이 절차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그러면서 제3자인 우리 정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일본을 대신해 책임을 떠안고 피해자에게 금전을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동안 윤석열 정부는 전범기업들의 성의 표시를 유도하는 선에서 문제를 마무리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사과 표명과 더불어 약간의 금전 출연이 윤 정부가 말하는 성의 표시로 이해돼 왔다. 우리 측이 모든 책임을 떠안는 방안을 제시한 외교부의 협상 보고는 윤 정부가 성의 표시를 받아내는 일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피해 유가족과 참석자들이 일본 정부의 사과를 촉구하는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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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피고기업 등의 사과 가능성과는 별론으로, 확정판결 피고기업이 전체 강제징용 문제를 대표해서 사과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점과, 강제징용 문제 외에도 많은 다른 과거사 문제가 한일 간에는 산적해 있다는 점, 그리고 그간 일본 내각이 여러 차례 과거사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표명했음에도 여러 번 반복되면서 우리 국민들이 이를 신뢰하고 진정한 화해에 이르지 못하는 점 등에 대해 고민해왔습니다."
대법원 확정판결을 받은 전범기업들의 사과 표명을 받아내기 힘들다는 인식을 드러낸 보고다. '힘들다'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그런데 '피고기업이 사과하기가 불가능하다'(A)라고 하지 않고 '피고기업이 전체 강제징용 문제를 대표해서 사과하기가 불가능하다'(B)라고 보고했다. 미쓰비시와 일본제철 두 기업만 한국인들에게 강제노역을 시킨 것은 아니므로 두 기업이 전체 전범기업들을 대표해 사과하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피해자와 우리 국민들이 두 기업에 그런 사과를 요구한 적은 없고, 요구할 수도 없다. 패소 판결을 받은 두 기업은 자신들이 해를 입힌 피해자에게만 사과하면 된다. 두 기업이 전체 기업들을 대표해 사과할 이유도 권한도 없다. 그런 사과를 받아내는 것은 외교부의 소관이 아니고, 그것을 받아내지 못한다 하여 외교부의 협상 실패도 아니다. 그래서 B는 하나마나한 발언이다.
그런데도 A로 발언하지 않고 B로 발언했다. B는 얼핏 들으면 일본 기업의 사과를 받아내기 힘들다는 발언이지만, 한국인들이 미쓰비시·일본제철에 과도한 요구를 해 온 것 같은 느낌도 풍기고 외교부의 협상 실패가 불가피한 것인 듯한 느낌도 풍길 여지가 있는 발언이다.
외교부 국장은 '일본이 여러 차례 사죄·반성했는데도 우리 국민들이 신뢰하고 화해하지 못했다'고도 발언했다. 이 부분 역시 개운치 않은 느낌을 준다.
여러 차례에 걸친 일본의 사과·반성이 부족해서 우리 국민들이 신뢰하지 못했다는 건지, 일본이 충분히 사과·반성했는데도 우리 국민들이 신뢰를 표시하지 않았다는 건지 불투명하다. 어느 쪽을 책망하는 발언인지를 잠시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피해 유가족들이 "발언 기회를 주지 않는다"며 주최측에 항의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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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절한'이라는 수식어까지 붙이면서 일본이 그 같은 기존의 사과·반성을 성실히 지켜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언급했다. 새로운 사과를 받기보다는 기존의 사과를 활용하는 쪽에 무게를 둔 발언이다.
1995년 8월 1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는 식민지배와 침략을 언급하면서 "통절한 반성의 뜻"을 표명했다(무라야마 담화). 하지만 그가 사과한 대상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누구에게 하는 사과인지 불투명했다. 또 피해 복구에 대한 해법 제시가 없었다. 실제로는 통절한 반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1998년 10월 8일 김대중·오부치 선언 당시의 오부치 게이조 총리도 '통절한 반성'을 입에 담았다. 사과의 대상을 한국으로 명시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피해 복구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상대방에게 입힌 막대한 피해를 두 눈으로 외면하면서 말로만 반성하는 것을 통절한 반성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겉과 속이 다른 그런 식의 통절한 사과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도 했고(고이즈미 담화), 간 나오토 총리도 했고(간 담화), '심지어' 아베 신조 총리도 했다(아베 담화). 특히 아베의 경우에는 씁쓸한 여운까지 남겼다.
아베 신조는 패전 70주년(일본 표현은 '종전 70년')을 맞아 2015년 8월 14일 발표한 담화에서 '통절하게 반성한다'라고 하지 않고 '통절하게 반성했다'라고 발언했다. "일본은 지난 대전에서의 행동에 대해 거듭 통절한 반성과 진심 어린 사죄의 마음을 표명해왔습니다"라며 일본이 그런 반성을 이미 여러 차례 했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자신이 새롭게 사과를 한 게 아니라 과거의 사과들을 언급하는 데 그쳤던 것이다.
담화에서 그는 러일전쟁을 합리화하는 한편, 과거 침략전쟁을 대공황으로 인한 부득이한 선택으로 미화했다. 통절한 반성이란 표현과 배치되는 발언을 했던 것이다.
아베는 그해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합의 때 박근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위안부 강제연행에 대해 사과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측근에게 "어제 일로 모두 끝이니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라며 언짢은 듯한 발언을 한 사실이 극우 매체인 <산케이신문>에 보도됐다. 불과 넉 달 전에 표명한 '통절한 반성'을 스스로 파기했던 것이다.
바로 전날 일본 국가를 대표해 한국에 사과한 총리가 다음날 엉뚱한 발언을 했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도 아닌 총리 측근이 총리 몰래 언론에 제보하기는 힘들다. 자신의 사과 발언이 지지층인 극우세력에게 어떻게 비칠까를 염려했을 아베 신조의 내면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그가 운운한 통절한 반성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를 알려주는 사례다.
▲ 정진석 한일의원연맹 회장과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이 12일 오전 서울 여의도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 참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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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총리들이 언급한 통절한 사과나 반성은 알맹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 입장 표명이 제대로 유지되지도 못했다. 아베 신조의 경우에는 넉 달을 넘기지 못했다. 그래서 기존의 '통절한 사과'들은 강제징용 문제를 푸는 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일본이 통절한 사과의 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라면, 이렇게까지 피해자들을 무시하고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외교부 국장의 보고는 일본이 통절한 사과를 유지하도록 외교부가 압력을 가하거나 노력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본이 그렇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외교부 스스로 책임을 손에서 놓아버리겠다는 발언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서민정 국장의 보고에 앞서 인사말을 한 조현동 차관은 피해자 요구를 일본에 전달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일본 측도 이에 대해 진지한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라고 평했다. 그의 말처럼 일본이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면, 배상금은 물론이고 사과 한마디마저 거부하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는 일본이 과거의 통절한 사과 표명을 자발적으로 유지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번 공개토론회에서 나온 외교부의 결론은 '일본의 사과·배상을 받기 힘들므로 우리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간의 대일협상에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던 것이다.
조현동 차관은 "이제 우리는 과거엔 약소국 피해자였지만 당당히 먼저 손을 내밀 수 있을 정도의 크고 강한 국가가 되었습니다"라며 한국은 남에게 베풀 수 있는 강대국이라는 식으로 발언했다.
베풀 것은 베풀더라도 받을 것을 받아내는 나라가 강대국이라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다. 당연히 받아야 할 사과 한마디조차 받아내지 못한 채 일본이 요구하는 한일 군사협력에만 성실히 임하는 나라가 과연 강대국인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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