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강제징용, 日 '우회사과' 무게…한·일 재계, 모금 나설 듯
한·일 관계 개선을 위한 선결 조건으로 추진해 온 강제징용 해법 도출이 막판으로 치닫고 있다. 외교부는 1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 토론회’를 끝으로 공식적 의견 수렴 절차를 종결했다. 일본과의 막판 협의와 추가적인 피해자 설득 작업을 거쳐 조만간 해법을 발표할 예정이다.
핵심은 ▶재원 마련 방식 ▶일본의 호응 조치 ▶피해자 설득 등의 3대축으로, 발표 예정인 해법의 우선 적용 대상자는 대법원 확정판결로 승소한 강제징용 피해자 15명이 될 전망이다. 대법원은 2018년 미쓰비시중공업·신일철주금(일본제철) 등 일본 기업이 15명의 피해자에게 각 1억~1억5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후 지난 5년간 지연 이자가 적용돼 현재 배상금은 2억~2억5000만원 규모로 불어났다.
시작은 ‘포스코 40억’
정부는 우선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의 수혜 기업인 포스코에 40억원을 출연 요청해 피해자 15명에게 배상금을 지급한다는 계획이다. 이 작업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심규선 이사장)이 맡는다. 재단은 지난해 말 포스코 측에 기금 출연을 비공식 요청했다. 지난 9일 행정안전부가 기업 출연금을 활용해 피해자에게 배상하는 일을 재단이 맡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정관 변경 요청을 최종 승인하면서 재단은 조만간 포스코 측에 공문 등의 형태로 출연을 정식 요청할 예정이다.
포스코는 앞서 2012년 5월 이사회 의결을 거쳐 강제징용피해자지원재단에 100억원을 출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실제 60억원을 재단에 기부했고, 이 돈은 현재 재단의 기본자산으로 분류돼있다. 60억원의 예금 이자는 현재 강제징용 피해자 지원금으로 활용하고 있다. 재단은 포스코가 약속한 출연금 100억원 중 남은 금액 40억원으로 우선 배상금을 마련할 방침이다.
이후 일본 기업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 소송 2심을 진행 중인 피해자(약 140명)와 재판이 대법원에 계류된 피해자(약 110명)가 최종 승소할 경우엔 또 다른 청구권협정 수혜 기업·공공기관에 추가적으로 출연을 요청할 계획이다. 재단은 출연 요청이 가능한 대상으로 포스코를 포함해 한국전력·코레일·외환은행(현 하나은행)·KT&G 등 16개 기업·공공기관을 추려놓은 상태다.
전경련·경단련 '모금 플랫폼'으로 나서나
이 때문에 정부는 청구권 협정의 수혜를 받은 공공기관·기업에 출연을 요청하되 해당 기금을 관리하는 별도 기구를 마련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구체적으론 한국의 전국경제인연합회와 일본의 일본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이 이 역할을 맡는 방안이다. 다만 전경련과 달리 경단련의 경우 일본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제한돼 일본 내에서 관련 논의가 진전될 수 있을지 우려가 나오는 상황이다.
한·일 경제 단체가 각각 출연금을 모아 관리하는 ‘바구니’ 형태의 플랫폼을 만드는 방식은 포스코 등 출연 가능성이 있는 기업의 부담을 줄이고, 일본 전범 기업이 기금 마련에 참여하는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경제 단체가 나서면 기금 출연 목적이 직접 배상이 아닌 기부를 통한 사회공헌 활동의 성격으로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日 ‘우회 사과’ 방안에 무게
강제징용 피해자 측이 요구해온 ‘일본 측의 사죄 표명’에 대한 대안도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협의를 통해 양국은 한국 정부가 공식 해법을 발표한 직후 일본 측이 과거 내놨던 담화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발표하는 방안까지는 의견을 상당히 좁힌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일본이 '어떤 담화'를 계승한다고 밝힐지에 대해선 이견이 있다.
외교부는 일본의 입장문에 최소한 '김대중·오부치 선언(1998년)'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고 요구했다고 한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에는 과거사 문제에 대해 "통렬한 반성과 사죄"란 표현이 담겨 있다.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군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와 반성이 담긴 '고노 담화(1993년)'가 대상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일본 측은 특정 담화를 지목해 이를 계승한다는 입장을 발표하는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이에 따라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채 '과거의 담화를 계승한다'는 포괄적 표현으로 절충안을 마련할 가능성이 있다.
외교가에선 이에 대해 "일본 정부 입장에선 '직접 사과는 하지 않았다'는 명분을 만들고, 한국 정부 역시 '일본 측이 사실상 사과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정치·외교적 우회로"란 해석이 나온다.
외교 소식통은 “일본 측은 사죄 표명을 피해자에 대한 배상보다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요구로 받아들이고 있고, 사과 요구는 한·일 양국이 한국 대법원 판결에 따른 외교적 해법을 논의하는 현 상황과 전혀 별개의 문제란 입장을 보이고 있다”며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경우 윤석열 대통령이 계승 입장을 밝힌 상징적 선언이고, 고노 담화는 일본의 집권 자민당으로서도 수용 가능한 담화인 만큼 현재로선 조율 가능한 최선의 방법으로 보인다”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퍼즐, ‘불가역성’과 ‘구상권’
구상권 청구 문제도 향후 핵심 뇌관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채무자(일본 기업)의 채무를 넘겨 받아 채권자(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면 구상권을 청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다만 일본 기업에 구상권을 청구할 경우 또다시 일본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고,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으면 피해자 측이 반발할 소지가 있다.
이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구상권은 청구할 수 있는 권리일 뿐 반드시 청구해야 하는 의무 조항은 아니기 때문에 강제징용 문제의 해법을 최종 도출하고 이를 실행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추가적인 논의와 협의가 필요한 사안”이라며 “강제징용 문제는 애초에 모든 피해자를 100% 만족시키기 어려운 구조지만 최대한 많은 피해자들이 정부 해법에 만족할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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