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이재명 수사 앞에 멈춰선 정치
노동조합 회계를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을 개정해야 한다. 주52시간인 근로시간을 유연화하기 위해서는 근로기준법을 개정해야 한다. 연금 개혁도, 교육 개혁도 법 개정이 필요하다. 윤석열정부가 국정 운영 목표로 설정한 노동·교육·연금 3대 개혁 모두 법을 개정해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호통을 쳤던 반도체 기업의 세금 감면도 관련 법안을 개정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선 법 개정이 안 되면 개혁도 없다.
우리 국회는 입법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태다.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지난 8일 고위당정협회의에서 “정부가 발의한 법률안 110개 중 95개가 통과되지 못했다”며 “야당이 초당적으로 협력해주시기를 간곡히 요청드린다”고 말했다. 정부 제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하는 이유는 더불어민주당의 반대 때문이다. 민주당은 169석을 가진 과반 정당이다. 민주당이 반대하면 법안은 통과될 수 없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선택지는 두 개였다. 민주당을 설득하거나, 입법을 포기하거나였다. 결과만 보면 대통령의 선택은 후자였다. 95개 법안이 통과되지 못한 것은 선택의 결과물이다. “정권 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발목을 잡는다”는 식의 비난은 공허할 뿐이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왜 민주당 설득을 포기했을까. 나는 민주당 대표가 이재명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김부겸 전 총리·우상호 의원·이상민 의원이 민주당 대표였다면, 윤 대통령은 대화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피의자’ 이재명 대표와 대화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여권이 대화 대신 선택한 것이 수사다. 진용을 정비한 검찰은 묵혔던 사건 파일들을 검토하며 수사를 본격화했다. 지난 10일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제1야당 대표가 검찰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대장동 비리 의혹 사건, 변호사비 대납 의혹 사건도 속도를 내고 있다.
여권 입장에서 최상의 시나리오는 이 대표 구속하고, 총선에서 승리한 뒤 3대 개혁에 성공하고, 재집권을 이루는 그림일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이 대표를 정치에서 ‘제거’할 수 있을까. 이 대표의 범죄 혐의가 심각하고 검찰 수사로 많은 것들이 밝혀지더라도 이 대표를 제거하기란 쉽지 않다. 유죄 여부를 떠나 현실적으로 그렇다.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이 대표 임기는 내년 8월까지다. 우리 사회의 30%는 ‘대장동 사건 주범은 이재명’이라고 믿고 있고, 30%는 ‘이재명은 무죄’라고 믿고 있다. 나머지 40%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으니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는 쪽이다. 수사가 어떻게 결론 내려지더라도 지루한 법정 공방이 계속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이 이준석 전 대표를 몰아내는 데 석 달이 걸렸다. 이 전 대표를 몰아내는 과정에서 극심한 내분을 겪었고, 윤 대통령 지지율은 20%대로 추락했다. 제1야당 대표를 제거하려면 이준석 사태와는 차원이 다른 파동을 겪어야 한다. 윤석열정부는 그 파동을 감당할 체력이 있을까. 이 대표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면, 지금과 같은 불통의 정치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여야는 대립하고, 정부 국정 운영은 삐걱댈 수밖에 없다. 3대 개혁도 말의 성찬에 그칠 확률이 높다.
윤 대통령과 국민의힘은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이라는 현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내년 총선이 변수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총선에서 누가 승리할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하더라도 국정 운영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문재인정부는 21대 총선에서 위성 정당까지 합쳐 180석을 확보했지만, 기억에 남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 윤 대통령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다.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는 시점이나 내년 총선 이후가 아니다. 집권 2년 차에 하지 못한 일을 총선 이후에 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의 정치가 수사 앞에 멈춰선 상황은 불행한 일이다. 정치는 정치대로, 수사는 수사대로 진행돼야 한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정치를 수사에 끌어들였다고 비난하고, 민주당은 대통령이 수사를 정치에 끌어들였다고 비난한다. 정치가 멈춘 상황이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기 시작하면 결론이 나지 않는다. 결론이 나지 않을 때 과감한 결단을 통해 해법을 만들어내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다. 다시 윤 대통령이 선택할 시간이다.
남도영 논설위원 dy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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