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새옹지마’를 몇 번이나 겪은 날

2023. 1. 13.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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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체력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고약한 심술보 귀신이 장난을 친 게 틀림없다. 아니면 새벽부터 준비해 놓고, 떡하니 엉뚱한 짓을 저지를 리가 있나. 발단은 이랬다. 경북 상주에서 오전 11시에 강의가 있는 날이었다. 나름 프로 강사로서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는 데 이골이 났다. 지역에 갈 때는 웬만하면 KTX를 선호한다. 시간이 지체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까. 열차가 운행하는 중에도 몸을 움직일 수 있어 좋았다.

하필 상주에는 KTX가 닿지 않았다. 강의 장소가 버스터미널에서 가깝다니 어쩔 수 없이 고속버스를 예약해 뒀다. 2시간30분 거리여서 좀 일러도 7시50분 차를 타고 갈 요량이었다. 6시 전에 일어나 부산하게 준비를 마친 후 지하철을 탔다. 7시30분쯤 터미널에 도착했으므로 시간 여유가 있었다. 화장실에 들른 뒤 승차장에 나가 기다리는데 시간이 돼도 차가 오지 않았다. 맙소사, 티켓은 경부 터미널로 끊어 놓고 몸은 동부 터미널에 와 있으니 버스가 오겠는가.

그때부터 장례식장에 꽂은 향처럼 머릿속이 새하얗게 타들어갔다. 어쩌지? 상주와 제일 가까운 도시로 가서 환승을 해야 하나. 맞춤한 버스가 있는지 매표원에게 달려가 물었다. 애절한 눈빛으로 부탁했지만 MZ세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어르신 말이, 기다렸다가 그냥 다음 8시50분 차를 타는 게 최선이란다. 흑! 2시간30분 후에 도착하면 11시20분이니 청중은 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지각은 강사에게 결강만큼이나 최악의 실수다. 지금껏 수많은 지역에서 강의를 해봤지만 터미널을 착각한 건 처음이요, 제시간보다 늦게 도착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경부 터미널에 그나마 10분 빨리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느니 일단 그쪽으로 가자. 발에다 엔진이라도 단 듯 지하철로 이동, 아슬아슬하게 8시40분 차에 올라탔다. 11시10분 도착이니 담당자에게 딱 15분만 기다려 주십사 문자로 양해를 구했다.

이것으로 상황이 정리됐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필 서울에 폭설이 온다고 예고된 날이었다. 그래서 다들 차를 집에 두고 나온 걸까. 초반엔 오히려 길이 막히지 않아서,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오늘따라 기상청 예보는 면도날같이 예리했다. 살살 흩날리던 눈발은 점점 휘날렸고 도로에 쌓여 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지. 1시간 정도 신나게 달리던 버스가 차츰 기어가나 싶더니 기어이 멈췄다.

버스 화면에는 12시10분 도착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흑흑! 강의고 뭐고 다 끝났네. 유리창을 열고 도로에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가용이면 인터체인지에서 방향을 돌리련만 하염없이 간장을 태우며 버스에 앉아 있을 수밖에. 그때 담당자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작가님, 잘 오시고 계세요?” “다 틀렸어요. 도로에 사고가 나서, 12시 넘어 도착한대요.” “어머머, 이걸 어쩌지? 제가 잠시 후에 다시 전화 드릴게요.”

결론부터 듣겠는가? 나는 박수를 받으며 강의실로 들어가서 무사히 강의를 마쳤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원래는 신청자가 부족해 강의 자체를 취소하려 했단다. 그런데 마감 하루 전, 한 회사에서 단체로 참석하겠다고 결제를 해서 불사조처럼 부활했다는 것이다. 지점장이 연말을 맞아 마침 적당한 강의를 찾고 있었다나? 그러니 담당자가 연락을 해서 강의 시간을 아예 오후 1시로 미루는 게 기적처럼 가능했다. 게다가 상주에는 서울보다 더 큰 눈이 쏟아지고 있단다. 나는 지각한 게 아니라 폭설과 교통체증을 뚫고 멀리 서울에서 달려온 책임감 투철한 강사로 변신한 것이다.

돌아오는 버스 안, 이번엔 느긋하게 앉아 겨울 나라의 새하얀 풍경을 만끽했다. 내 인생 사자성어인 ‘새옹지마’를 몇 번이나 겪은 날이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를 잘했다. 2023년에도 일희일비하지 말고, 내 할 도리나 성실히 하자.

마녀체력 (‘걷기의 말들’ 작가·생활체육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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