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탁의 시선] '하루이틀삼일사흘’ '하드캐리하길'
사흘이 4일? 또 번진 문해력 논란
한자 교육이 급감하고 독서량이 줄면서 문해력 비상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학교 안내문에 ‘중식 제공’이라고 적자 젊은 학부모가 ‘우리 아이는 한식을 좋아한다’고 항의했다거나, 도서관 사서 선생님에게 반납하라는 문구를 보고 책을 사서 보냈다는 경우까지 전해졌다. ‘골이 따분한(고리타분한) 성격’처럼 잘못 쓰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에 윤석열 대통령도 문해력 강화를 강조하고, 한자를 쓸지는 모르더라도 의미는 가르치자는 제언 등이 쏟아졌다.
하지만 요즘 의사소통에 쓰이는 말 가운데 무슨 뜻인지 헷갈리는 현상은 젊은 세대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그룹 방탄소년단(BTS)의 맏형 진이 지난해 말 입대하면서 팬 커뮤니티에 ‘자, 이제 커튼콜 시간이다’는 문구를 올렸다. 커튼콜은 공연 후 출연진이 관객의 박수에 답해 다시 무대로 나오는 것을 뜻한다.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웠는데, 진이 ‘게임 캐릭터 진의 대사’라고 힌트를 남겼다. 찾아보니 온라인게임 캐릭터 진이 ‘공격 모드’에 쓰는 표현이었다.
게임용어 낯선 기성세대들 당황
온라인 게임에 익숙한 세대가 일상에서 쓰는 생소한 표현은 이 밖에도 많다. ‘내가 하드캐리 할 테니 나를 믿고 따라와’에 등장하는 하드캐리는 팀워크가 중요한 게임에서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한 플레이어나 행위를 가리킨다. 게임 캐릭터의 능력치를 순간적으로 올리는 스킬을 ‘버프’라고 하는데 ‘오늘 점심시간에 버프 받고 일했다’는 식으로 쓰인다고 한다. 중장년 세대에겐 대개 해석 불가다.
카타르 월드컵 16강에 진출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태극기에 적어 열풍을 일으킨 ‘중꺾마’(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표현도 유래는 게임 관련이었다. ‘롤드컵’으로 불리는 리그오브레전드 2022 월드컵 챔피언십에서 우승한 프로게이머가 1라운드 패배 후 인터뷰에서 “저희끼리만 안 무너지면 이길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자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제목이 달렸다고 한다.
문해력이 떨어지면 사회의 지적 기반이 허약해 지고, 학습 역량 저하 등 여러 문제를 일으킨다. 급속한 디지털화가 진행된 한국에서 문해력 저하는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모두에게 문제다. 소통에 차질이 생겨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기 어려워질 뿐 아니라 무엇이 사실인지 판단이 힘들어지고 가짜 정보와 가짜 뉴스 구별에 구멍이 난다.
정치적 진영 논리가 팽배한 국내 상황에선 확증 편향에 쉽게 빠지는 현상도 뚜렷하다. 사회적 갈등의 접점을 찾기 어렵고,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에 대한 공격이 디지털 공간에 난무한다. 이런데도 좋은 학벌에 화려한 경력을 지녀 문해력 부족과는 거리가 멀 것 같은 정치인들마저 소통의 문을 닫은 채 상대를 밟고 넘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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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 난감한 정치지도자들 언행
한자어나 게임 용어가 아닌데도 정치 주역들이 쏟아내는 언어는 해석하기 쉽지 않다. 윤 대통령은 “당무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었다. 하지만 국민의힘 당 대표 선출을 앞둔 ‘윤심’ 논란 속에 저출산고령사회위 부위원장인 나경원 전 의원과 대통령실이 보여주는 양상은 국민의 문해력을 시험한다. 나 전 의원은 사의를 보냈다는데 대통령실은 “들은 바 없다”고 했다. 친윤 측의 난타전에 이어 이제는 나 전 의원에 대한 애정이 커 사의를 수용할 뜻이 없다는 보도가 전해진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선후보 시절 국회의원 불체포·면책 특권 폐지를 공약했다. 하지만 어제 회견에선 “경찰이 적법하게 권한을 행사하면 수용하겠지만, 경찰복을 입고 강도 행각을 벌인다면 판단은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8개월이 넘도록 윤 대통령과 제1야당 지도부는 만난 적이 없다. 올 신년인사회 때도 이 대표가 불참했는데, 정부가 e메일로 초대했다는 신경전만 시끄러웠다. 요새 표현대로 주문해본다. 하루이틀삼일사흘 ‘커튼콜 시간’이라며 서로 공격만 할 게 아니라 중꺾마 정신으로 대화를 하드캐리해달라.
김성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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