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칼보다 돈” 재정국가 송나라, 제국을 바꾸다
중국사를 이끈 ‘돈의 힘’
세 가지 힘은 문명 발생 초기부터 나란히 존재했지만, 전통적 역사기록에는 무력이 가장 잘 보이는 힘이었다. 근대역사학에서 경제사와 사상사 분야가 전통적 역사학의 약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정사(正史) 등 관찬 사서의 비중이 큰 중국의 역사기록에는 군사적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다. 고대사 자료에 재력·경제 방면의 내용이 극히 적은 중에 하나의 집중토론 내용이 이례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있다. 기원전 81년 많은 학자와 관료들이 모여 경제정책을 토론한 내용을 정리한 『염철론(鹽鐵論)』이다.
■
「 금나라 침공으로 남송 이전 ‘굴욕’
막대한 재물 바치며 평화를 선택
당나라 ‘무력국가’에서 방향 틀어
요·금·서하와 공존, 몽골 정복 늦춰
송 경제체제 후세 왕조로 이어져
마오쩌둥 “내부 안정이 우선” 평가
」
진정한 천하통일 이룬 한 무제
‘염철회의’가 열린 것은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가 죽은 6년 후의 일이다. 진 시황의 통일은 무제 즉위보다 80여 년 전이었지만 진정한 천하제국은 무제가 완성한 것이었다.
흉노 격퇴와 조선·남월 정벌 등 무제의 대외정책은 잘 알려져 있거니와, 중앙집권 강화를 지향한 내부 정책들도 있었다. 동중서(董仲舒)를 앞세워 사상계의 표준을 세웠고, 경제 통제를 강화한 정책들이 있었다. ‘평준(平準)’과 ‘균수(均輸)’ 원리에 따라 국가가 유통에 개입함으로써 상인의 역할과 이익을 줄이는 대신 서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국고를 늘리는 방향이었다. 이 적극적 경제정책의 목적이 대외정벌의 비용 확보에 있었고 무리한 추진으로 천하가 피폐해졌다는 비판이 염철회의에서 제기되었다.
왕조시대를 벗어난 후세 사람의 눈에는 관념적인 비판으로 보인다. 무제의 통일정책은 중간세력의 억제에 의미가 있었다. 『사기』 ‘유협열전’의 곽해(郭解) 이야기에 그 정책의 몇 가지 특징이 비쳐 보인다.
무제는 즉위 직후부터 50년에 걸쳐 무릉(茂陵)을 축조했는데, 단순한 무덤 만들기가 아니었다. 각지의 부호 1만 호(戶)를 옮겨와 무릉을 옹위할 도시를 만드는 것이 정말 큰 사업이었고, 민간의 재력가들을 통제하는 사민(徙民) 정책의 목적이 있었다.
사민 대상을 선정하는 재산 규모의 기준이 있었다. 곽해의 재산은 이 기준에 미달했으나 임협(任俠)의 명성으로 민간의 영향력이 큰 사람이어서 사민 대상에 들어갔다. 조정의 논의 중 곽해는 대상이 아니라는 의견을 대장군 위청(衛靑)이 내자 무제는 “그대가 나서서 두둔해줄 정도라면 그 사람의 힘이 어느 부호보다도 크군” 하고 곽해를 빼지 못하게 했다.
얼마 후 곽해를 비방하던 사람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일이 있었다. 누구 짓인지 곽해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사람을 눈 흘겨서 죽이는 것이 칼로 죽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죄”라는 주장에 따라 곽해가 처형당했다. ‘애자살인(睚眦殺人)’이란 말의 출처다.
군사력 약화 무릅쓴 중앙집권 정책
무제가 죽자 그의 중앙집권 강화정책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왔다. 강력한 정책을 이어갈 영도력이 후계자에게 없었기 때문에 염철회의가 열린 것이다. 민간의 명사와 학자 60여 명이 초청받아 조정 관리들과 토론을 벌였다. 명확한 결론이 나오지는 않았으나 그 후의 정세는 민간과 지방 세력에 유리한 쪽으로 펼쳐졌다. 한나라의 중앙집권력이 약해진 것이다.
왕망(王莽·재위 9~23년)의 신(新) 건국은 무제 이후 약화한 중앙집권력의 회복에 뜻을 둔 것이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그 후 수백 년간 중화제국의 통일성은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 당나라 초기의 위세도 지방세력의 연합에 기초를 둔 것이었고, 중기 이후 조정의 통제력 약화에 따라 ‘절도사’란 이름의 군벌들이 각지를 할거하기에 이른다.
송 태조(재위 960~976)가 즉위 초에 연회석상에서 동료였던 장군들에게 조기 은퇴를 권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술 한 잔에 군대 내놓기(盃酒釋兵權)’ 일화는 태조의 군사적 통일 정책을 보여준다. 태조는 중요한 군대를 모두 조정 직할의 금군(禁軍)으로 편성했다.
군사적 통일에 따라 내부의 위협이 줄어든 대신 외부의 위협이 커졌다. 종래 장군들이 자기 몸처럼 아끼며 키우던 군대에 비해 지휘관을 조정에서 임명한 금군은 전투력이 약했다. 요, 금, 서하에 대한 송나라의 군사적 열세는 여기에 기본 원인이 있었다.
국가질서에 위협이 된 ‘애국 장군들’
12세기 초 북방의 요-금 교체 정세에 잘못 대응하면서 송나라는 최악의 군사적 위기에 빠졌다. 1127년 수도 개봉 함락으로 온 조정이 금나라에 포획된 후 잔여 세력이 고종(재위 1127~1162)을 옹위해 송나라 명맥을 이었다. 1138년 남송의 행재(行在)가 항주에 자리 잡고 1142년 소흥화의(紹興和議)로 두 나라 관계가 안정될 때까지 총체적 혼란이 계속되었다.
금나라는 개봉 함락 이후에도 남방을 향한 야욕이 없어서 점령 지역에 괴뢰 왕조만 세워 놓고 방치했다. 악비(岳飛·1103~41), 한세충(韓世忠·1089~1151) 등 여러 하급 무장들이 이 공간 속에서 큰 군사력을 키워냈다. ‘악가군(岳家軍)’ ‘한가군(韓家軍)’으로 불린 이들의 군대는 송나라의 정규군대 밖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악비의 비극은 이 혼란 속에서 빚어졌다. 금나라와 전투가 이어지는 동안에는 의병(義兵) 성격의 항금(抗金) 무장들이 중요했지만, 화의로 돌아서는 데는 걸림돌이 되었다. 금나라는 애초에 정복의 야욕이 없었고, 송 고종도 적당한 선에서 사태를 수습하고 싶었다. 여진족의 완전한 퇴치를 주장하는 항금 무장들이 곤란한 존재가 되었다.
신흥 무장들을 통제하기 힘든 문제도 많았다. 군부 내 알력으로 인한 쿠데타로 황제가 일시 퇴위한 묘유병변(苗劉兵變, 1129)이 있었고, 금나라 쪽에 붙은 장수들도 있었다. 조정의 병권 정비 시도에 반발한 장수가 휘하병력 4만 명을 이끌고 넘어간 회서병변(淮西兵變·1137)이 특히 충격적이었다. 악비를 회군시킬 때는 금자패(金字牌·신속 전달과 즉각 이행을 강조하기 위해 금색 글자로 적은 어명)를 열두 차례나 내려보내야 했다.
고종은 180년 전 태조의 딜레마에 다시 마주쳤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 이질적 요소를 안고 갈 것인가. 외세와 타협하면서 내부 불안 요소를 척결할 것인가. 선택은 후자였고 악비가 희생되었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게 백성에 편안
남송을 안정시킨 소흥화의(1142)는 정통론 관점에서 굴욕적 사건으로 지탄받아 왔다. 금나라에 막대한 세폐(歲幣)를 바치며 상국(上國)으로 받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져보면 소흥화의는 송나라의 성공이었다. 세폐를 바치고 상국으로 받들던 것은 요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휘종(재위 1100~1126)의 오판으로 빚어진 난국을 수습해 송나라 체제를 되살려낸 계기가 소흥화의였다.
‘돈으로 평화를 사는’ 것은 건국 이래 송나라 대외정책의 기조였다. 서하(西夏)와의 관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서하는 서북방 감숙·섬서 방면에 있던 지방세력으로 1030년대에 칭제(稱帝)를 했으나 천하 형세를 좌우할 큰 세력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송나라가 쉽게 대등한 황제국으로 인정하며 막대한 세폐를 보낸 것은 요나라와의 관계에 지렛대로 삼기 위한 목적으로 해석된다.
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1901~1995)는 중화제국의 성격이 당나라의 ‘무력국가’에서 송나라의 ‘재정국가’로 넘어간 사실을 일찍이 설파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되새길 의미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탁월한 관점이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정복 과정에서 금나라 멸망(1234) 후 40여년간 송나라가 버틴 이유도 국가 성격에 있었다. 무력국가 금나라는 무력 대결의 패배로 간단히 끝났다. 반면 재정국가 송나라는 파괴 대상이 아니라 접수 대상이었다. 송나라에서 발행한 교자(交子·지폐)의 가치를 왕조 멸망 후에도 원나라에서 보장한 사실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송나라 왕조는 끝났어도 송나라가 빚어낸 국가 성격은 원나라를 비롯한 후세 왕조들로 이어졌다.
소흥화의를 주도하여 천추의 간신으로 오명을 남긴 진회(秦檜·1090~1155)에 대한 재평가가 20세기 들어 늘어난 것은 정통론이 힘을 잃고 송나라의 국가 성격에 대한 이해가 발전한 결과다. 사상가 후스(胡適)는 진회가 “큰 공을 세우고도 오늘까지 욕을 먹어 온 것은 억울한 일”이라 했고, 마오쩌둥(毛澤東)은 주화(主和)의 책임이 진회 아닌 고종에 있으며 “내부 안정을 앞세웠기 때문에 금나라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기협 역사학자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성경험 있어?" 새벽 고교생 제자에 전화한 40대 담임 | 중앙일보
- 거제 '렌터카의 비극'...SUV 200m 아래 바다 추락해 4명 사망 | 중앙일보
- "테니스 열정 식었네" 억측 반전…미혼 테니스스타 임신 깜짝 공개 | 중앙일보
- 재벌집 외아들 또 사고쳤다…행인 폭행한 '중국 셀럽' 정체 | 중앙일보
- 이전 스폰서 사진 SNS서 지웠다…'톰 김' 김주형의 심리 | 중앙일보
- "악플도 괜찮았는데, 이상민이…" 이태원 생존자 무너뜨린 말 | 중앙일보
- 여친 감금 폭행에 개 배설물 먹인 남친…스토킹은 왜 무죄? | 중앙일보
- "윤 정부 이리 일 못하는데"…지지율 하락에 커지는 이재명 불만 | 중앙일보
- '들기름' 싸들고 도망자 김성태 생파…조력자 2명도 조폭이었다 | 중앙일보
- ‘빌라왕’도 장기말, 배후 드러났다…628채 등친 전세사기 전말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