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전 변호사 죽였다" 자백 믿은 1·2심, 대법이 뒤집은 이유

김정연 2023. 1. 12.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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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A씨가 캄보디아에서 체포돼 제주국제공항으로 들어오는 모습. A씨는 "20년 전 내가 친구와 공모해 이승용 변호사를 협박하려다가 죽였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자백해 재수사 대상이 됐다. 살인으로 기소돼 2심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대법원은 "A의 진술 주요부분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진술 외에 A가 공모한 범인이라는 정황증거도 부족하다"며 원심을 뒤집었다. 뉴스1


1999년 11월 5일 새벽, 제주시 한 아파트 앞에 주차된 승용차 안에서 칼에 찔린 채 피에 푹 젖은 남성이 운전석에 앉아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44세였던 故 이승용 변호사였다. 제주 출신인 이 변호사는 1985년 검사로 임용됐지만 1992년 옷을 벗고 고향으로 내려가 개업했다. 그리고 7년 뒤 살해됐지만 사건은 장기미제로 남았다.

이 변호사의 시신에선 배에 두 곳, 가슴 가운데 한 곳 흉기에 깊게 찔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칼이 심장을 바로 찔러, 심장 파열로 사망했다는 부검 결과가 나왔다. 목에 있는 가벼운 칼자국을 근거로 경찰은 이승용 변호사가 범인에게 한 차례 공격당한 뒤 급히 차에 타 이동하려다 재차 흉기에 찔려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밤 사이 벌어진 일이라 목격자도 없고, CCTV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증거는 차량 내부 현장과 도로에 일부 떨어진 혈흔뿐이었다. 범행 도구·지문·족적 등 범인이 남긴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현상금 500만원을 걸며 수배에 나섰지만 성과는 없었다.

2014년 11월 4일 이 사건에 대해 죄를 물을 수 있는 공소시효 15년이 지났다. 장기미제로 남은 이 사건은 이후 살인죄 공소시효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대구 개구리소년 사건’ 등과 함께 반복적으로 언급됐다.


공소시효 끝난 줄 알고 제발로 나섰다가 덜미잡힌 용의자


2021년 8월 '제주 변호사 살인사건'의 공범이라고 자백한 A씨가 검찰로 이송되는 모습. 뉴스1

20년이 지난 2019년 가을, SBS ‘그것이 알고싶다’ PD에게 제보가 들어왔다. “조직 두목의 지시를 받고 내가 친구를 사주해서 이 변호사를 협박하다가 실수로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과거 폭력조직 ‘유탁파’에 몸담았다는 제보자 A(57)는 11월 캄보디아에서 인터뷰에 응해 “두목이 '혼 좀 내주라'고 지시해서, 친구 B와 상의해서 준비했다” “상해만 가하려고 했는데 B가 혼자 갔다가 일이 잘못돼 사망했다”고 말했다. 당시 A는 B와 함께 피해자의 동선을 파악하고, 피해자가 검도 유단자인 것으로 생각해 칼을 사용하기로 하는 등 범행을 준비했다고도 했다.

제작진에게 먼저 접근한 A는 본인이 가담했다는 범죄행위를 소상히 밝히면서도 거리낌이 없었다. 공소시효가 지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A가 지목한 ‘살인 지시’ 유탁파 두목과 주범 친구 B도 모두 사망한 뒤였다. 그러나 2015년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살인 등으로 법정형에 사형에 이르는 범죄에는 공소시효를 적용하지 않게 된 사실은 몰랐다. 2020년 6월 인터뷰가 방송됐고, 경찰은 재수사에 돌입했다. 검찰은 A를 ‘살인’의 공동정범으로 기소했다. 방송 이후 수사망이 좁혀지자 A는 자신의 인터뷰를 내보낸 PD에게 “넌 곧 간다. 외롭진 않을 거다. 나와 같이 갈 테니. 이젠 우리 한날에 피울 거야, 향”등 문자를 보내 협박한 혐의도 추가됐다.


1·2심은 ‘자백’ 믿었지만…대법은 틀리고, 바뀌는 점 짚었다


대법원은 '제주 변호사 살인사건'에 대해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광주고법으로 돌려보냈다고 12일 밝혔다. 범행 당사자라고 주장하는 피고인의 진술이 있더라도,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지고 증거가 부족하다면 유죄로 판단하기 어렵다는 취지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조한 판결이다. 연합뉴스

A의 살인 혐의에 대한 1심 재판부와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무죄’와 징역 12년 형으로 엇갈렸다. 그러나 대법원 2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12일 원심을 깨고 사건을 광주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당사자의 진술이 있더라도, 진술의 주요 부분 신빙성이 떨어지고 진술 외의 구체적 증거가 부족하다면 죄를 묻기에 충분치 않다는 취지다.

원심의 판결을 뒤집은 가장 큰 근거는 A의 진술의 신빙성이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공소시효가 끝났다고 믿고, 금전적인 이득을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진술했다”며 A의 진술을 믿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대법원은 “진술의 주요한 부분에서 사실과 다른 점이 있었고, 진술 전체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했다. 사건의 시초가 된 “두목을 만나 지시를 받은” 시기에 두목인 백모씨는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점, 이후 “백씨가 아니라 다른사람”이라는 둥 수 차례 진술을 번복한 점 등을 들었다. 1‧2심에서 제보를 ‘믿을 수 있다’고 판단한 범행 도구 등에 관한 자세한 진술에 대해서도 “언론보도 등을 보고 추측이 가능한 내용”이라고 판단했다.

원심은 배를 두 차례 찌른 행위에 살인의 고의가 인정된다고 봤지만 대법원은 “우발적인지, 고의인지 판단하기 어렵다”고 해석했다. 그고는 “(A가 흉기를 직접 휘둘렀다고 지목한) B의 미필적 고의는 인정되지만 당시 싸움 과정에서 생긴 것이고, 현장에 없던 A에게까지 살인의 고의를 인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날 파기 환송으로 이 변호사 살인사건은 다시 장기미제로 남게 됐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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