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혜자를 감동시킨 봉준호 감독의 문자 한 통
[이준목 기자]
자신의 분야에서 흔들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살아온 사람의 인생은 그 자체로 한편의 드라마가 된다. 1월 11일 방송된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이하 유퀴즈)에서는 국가대표 댄스크루 '저스트절크' 멤버들과, 영원한 '국민엄마' 김혜자가 출연했다.
저스트절크는 지난해 방영된 엠넷 댄스 서바이벌 <스트릿 맨 파이터> 우승으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리더 영제이는 스맨파 출연 계기로 "세계 정상 타이틀을 얻은 이후 공연을 많이 하다가 코로나19가 터지면서 4-5년간 제대로 활동을 못했다. 그동안 젊은 친구들 사이에서 저스트절크가 한물간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오더라. 스맨파 섭외가 들어왔을 때 우리가 이빨빠진 호랑이가 아니고 건재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밝혔다.
저스트절크의 트레이드 마크인 칼군무에 대하여 경직되고 올드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하지만 절크 멤버들은 오히려 자신들만의 색깔과 주특기로 정면돌파를 선택했고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무대를 만들자'는 신념으로 레전드급 무대를 연출해냈다. 유재석은 "우리가 쉬고 있는 게 아닌데도 누군가 계속 자극을 하고 의심을 한다. 그것을 어떻게 결과로 증명할 것인가가 정상에 있는 사람들의 고민"이라며 절크에 공감했다.
절크는 2010년 첫 결성 이후 미국의 세계적인 힙합대회인 <바디락>에서 한국팀으로는 최초의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국내 사극인 <추노>와 <왕의 남자> OST에 맞춰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후 한국 전통요소를 반영한 무대는 절크 고유의 색깔로 자리매김했다.
이후 <아메리칸 갓탤런트>시즌 12에 출전하여 화려한 칼군무로 심사위원들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내며 쿼터 파이널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팀명이 한국어로 직역하면 '그냥 바보'이다보니 해외에서는 처음 소개할 때 비웃기 바빴지만, 춤을 보여주고나면 반응이 180도 달라졌다고. 2018년에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무대에도 참가하여 명실상부한 국가대표 댄스크루로 자리매김했다. 큰 성공을 거둔 이후에는 마침내 절크만의 보금자리인 연습실까지 만들며 오랜 꿈을 이뤘다.
멤버들 모두 절크이자 댄서로서의 강한 자부심과 끈끈한 팀워크를 드러냈다. 영제이는 팀원들을 대표하여 "여전히 춤출때가 가장 행복하다. 스맨파 우승할때도 '또 해냈다'라는 느낌이 들었다"라며 "팀 멤버들에게 항상 감사하고 이들이 더 잘되기는 바라는 게 목표이고 우선순위"라고 고백했다. 가난한 댄서 시절의 아픔을 잊지않은 영제이는 지금도 어린 팀원들에게 가장 자주하는 말이 "밥먹자 얘들아, 내가 사줄게"라며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생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드러냈다.
▲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 한 장면. |
ⓒ tvN |
▲ tvN <유 퀴즈 온 더 블록> 한 장면. |
ⓒ tvN |
이어서 61년차 영원한 국민배우 김혜자가 출연했다. 최근 60주년 기념에세이를 출간한 김혜자는 "저는 연기외에는 아무 것도 할줄 모른다. 엄마도 아내 노릇도 빵점이다시피했다. 그러다보나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들더라. 연기하면서 배운 것들, 추구해왔던 것들에 대하여 뭔가를 써보고 싶었다. 나를 정리하는 게 필요한 것 같았다"고 이유를 밝혔다.
김혜자의 대표작하면 역시 <전원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김혜자에게 국민엄마 타이틀을 붙여준 양촌리 김회장댁 사모님 이은심 역을 연기할 당시 그녀의 실제나이는 고작 39세였다. 김혜자는 "김수미는 더 젊은 나이(29세)에 일용엄니(60대) 역할을 했다. 그때는 나이많은 연기자가 별로 없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김혜자는 "전원일기는 사람을 가르치는 드라마였다. 부모가 하는 일, 자식의 도리 등이 드라마에 다 있었다. 나에게는 인생 교과서같은 작품이었다"며 의미를 돌아봤다.
22년간이나 방송했던 국민드라마였던만큼 에피소드도 많았다. 극중 아역출연자가 실제로 정상하여 성인 연기자가 되거나 군에 입대하기도 했다. 이 노인 역을 연기했던 고 정태섭 배우는 실제로 방송중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극중에서도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다. 김혜자는 극중 이은심이 전화기에 대고 돌아가신 어머니를 찾는 장면을 다시보면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김혜자는 "저때 정말 슬펐다. 나이 먹었어도 엄마는 보고 싶다"라며 먹먹한 감정을 감추지 못했다.
김혜자는 김정수(전원일기, 엄마의 바다, 그대 그리고 나)-김수현(사랑이 뭐길래, 청춘의 덫, 엄마가 뿔났다)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베테랑 작가들과 오랜 인연을 이어왔다. 김정수 작가에 대해서는 "섬세하고 결이 고운 사람"이라고 평했고, 김수현 작가와는 "17작품을 같이 했더라. 앞으로 그런 작가는 다시 안나올 거다. 사람의 폐부를 찌르는 대사를 쓴다"라고 설명했다. 김혜자는 "우리 나라 드라마가 발전한 게 그 두 사람이 경쟁하면서 썼을때라고 생각한다"고 극찬했다.
국민엄마의 모범적인 이미지가 강했던 김혜자에게 새로운 연기영역의 가능성을 열어준 인물은 바로 봉준호 감독이다. 봉 감독은 영화 <마더>의 엄마 역에 김혜자를 캐스팅하기 위하여 수년에 걸쳐 꾸준히 공을 들였다. 봉 감독은 김혜자를 만날때마다 시나리오만 주지않았을뿐 항상 극중 엄마 캐릭터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고. 김혜자는 "계속 그 여자 이야기를 해줘서 잊을 수가 없었다"며 미소를 지었다.
김혜자는 봉준호 감독의 기억에 대하여 "순진하게 생겼는데, 그 사람 천재다"라고 극찬하면서 "연기할 때도 나를 많이 가르쳐줬다. 스태프들에게도 조용조용하게 말하는 사람인데, 어느날 내가 눈물연기가 잘 안돼서 눈물이 나오니까 '우시는거 말고요'라고 혼을 내더라. 그럴땐 정말 땅으로 꺼지고 싶더라"는 일화를 밝히며 웃음을 자아냈다.
김혜자는 원빈과 연기했던 <마더>의 결정적인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연기하라는 지문을 보고 난감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박수속에 오케이를 받았지만 자신의 연기가 영 만족스럽지 않았던 김혜자는 봉 감독에게 "한번 해보세요, 어떻게 하는건가"라고 역정을 내고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다고. 봉 감독은 잠시후 김혜자에게 문자를 보내 "사람들이 환호할때는 인정하십시오"라고 김혜자의 연기를 칭찬하며 격려했다고.
김혜자는 "봉준호 감독에게 감사하다"라면서 "제가 누군가의 부인이라는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한정된 역할에서 고민할 때 제게 <마더>를 제안해줘서 너무 좋았다"라고 고백했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어린 시질부터 김혜자의 열렬한 팬이었고 같은 동네에서 만난 김혜자를 몰래 따라간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봉 감독은 <마더>에 김혜자를 캐스팅한 이유에 대하여, 그녀가 출연했던 <여>라는 드라마에서 어린 시절 유괴해온 딸에 대한 집착과 광기를 드러내는 캐릭터를 연기한 것을 보고 평소 국민엄마의 이미지와는 또다른 모습에 강한 인상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새로운 모습을 표출할 기회가 없으셨겠다'는 생각에 김혜자만의 강렬하고 다크한 <마더>를 구상하게 됐다고. 봉준호 감독은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이라는 지문에 대해서는 "배우의 표정을 묘사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간략하게 써놓고 넘어갔다. 제가 만든 스토리보드에서 캐릭터의 눈코입은 비워놓고 묘사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봉 감독은 "그런 부분들을 카메라 앞에서 표현해내는 것이 위대한 배우의 몫이 아닐까. 와, 저런 복합적인 복잡미묘한 감정들을 표현해 내시는구나, 매 테이크 찍을때마다 감탄했다"라며 김혜자의 연기에 경외심을 전했다.
정작 본인의 연기를 마음에 안들어하는 김혜자에게는 "스태프들이 환호하는 멋진 연기였으니 마음 편하게 하시라고 문자를 보내드렸다"고 회상했다. 또한 인간 김혜자에 대해서는 "소녀같은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공주는 아니다. 현장에서 항상 헌신적이고 특별대우도 요구하지 않는다. 막내 스태프들과 똑같이 해달라고 편하게 생각하라고 먼저 이야기해주시는 분"이라고 평가했다.
김혜자는 국민엄마로 알려진 이미지와 달리 엄마로서 자녀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드러냈다. 김혜자의 아들은 "엄마가 대본을 가지고 있으면 앞에 장막이 쳐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고.
김혜자는 "엄마로서는 빵점이었다. 그래서 연기를 더 똑똑히 해야한다. 아이들을 그렇게 외롭게 했는데 연기마저 흐지부지하면 정말 면목이 없다"고 이야기했다. 아픈 딸 배를 문질러줬는데 오히려 딸이 어색해하며 불편해하던 일화를 고백하며 자녀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다는 김혜자는 "너희 엄마는 어떻게 이렇게 연기를 잘하니?라는 소리라도 듣게 해줘야 한다"고 고백했다.
한편으로 김혜자는 작고한 남편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우리 남편은 정말 좋은 사람"이라고 고백하더니 돌연 눈물을 흘렸다. 11살 연상으로 세상물정 모르는 김혜자를 어린애보듯 살뜰하게 챙겼다는 남편은 "어떡하나, 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데"라며 세상을 떠나기전에도 김혜자를 걱정했다고. 김혜자는 "내가 죽으면 천국엔 못가도 천국 문앞에까지는 데려달라고 소원한다. 왜냐하면 우리 남편은 당연히 천국에 있을테니 '미안해 자기 살았을 때 나 너무 잘못했지'라는 말을 해야 한다"며 주변을 먹먹하게 했다.
김혜자는 2010년대 이후로 연기인생의 또다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김혜자는 젊은 배우들과 호흡한 경험을 떠올리며 "젊음이란 참 빛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한편으론 "나이를 먹어간다는건 뭔가 슬프다. 구체적인 슬픔은 아닌데, 새벽에 눈떠서 창밖을 바라보면 '내가 이런 걸 다 못보고 떠나겠지?'라는 감정들이 든다"고 고백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모자 지간을 연기한 이병헌과의 명장면도 언급됐다. 극중 김혜자가 조용히 세상을 떠난 장면에서 이병헌의 오열 연기에 "나도 눈물이 나올까봐 이를 깨물면서 참았는지 모른다"라며 "괜히 이병헌이 아니더라. 괜한 소리를 안하고 작품 자체에만 몰입을 하더라"며 후배의 열연을 극찬했다.
당시 촬영을 하며 깐깐하기로 유명한 노희경 작가에게도 잔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고. 노 작가는 김혜자에게 "엄마를 그렇게 사랑스럽게 연기하면 어떡하냐. 그러면 누가 선생님을 또 캐스팅하겠냐"고 핀잔을 줬다고. 김혜자는 처음엔 황당했지만 "그 말이 맞더라"며 수긍했다. 극중 부모와 형제, 자녀들을 모두 잃은 기구한 운명의 여인을 연기해야 하는데 평소 하던대로 보통의 엄마를 연기하는 듯 했다는 것.
김혜자는 노 작가에게 "고마웠다"고 고백하자 정작 노 작가는 "제가 모질게 이야기해도 선생님 천성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따뜻함이 있었기에 동정을 받았지, 내가 구상한대로 악바리같이 연기했다면 안될뻔 했다"고 김혜자의 연기를 인정했다.
배우로서 기억력이 떨어져서 대사를 못외우고 연기를 못하게 되는 순간이 가장 두렵다는 김혜자는 "커닝페이퍼처럼 대본을 보는 것은 저에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소신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김혜자는 "앞으로도 제게 무슨 배역이 들어올지 생각만 해도 설렌다. 연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생에 감사하다"며 대배우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진심을 전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밀실에서 범인 찾기' 항일 액션 '유령', 절반의 성공
- 클래식 무대에서 리코더 든 남자, 유튜브가 바꾼 인생
- 사랑보다 은행 이자가 절실한 시대, 선 넘겠다는 유연석
- 매 맞지만 명랑한 '더 글로리' 현남, 염혜란이라 가능했다
- '골때녀' 탑걸, 눈물의 결승 진출... 1년 전 하위팀의 대반란
- 불혹 넘은 나이, '슬램덩크'를 51번째 읽고 있어요
- 3040 열광하는 '슬램덩크', 이제야 이유를 알겠다
- 중국 공격에 맞대응 자제하면서... 명림답부가 주는 교훈
- 비욘세 닮은 이야기... 노래는 아카데미상 후보까지
- "부캐 만들어 다른 장르 노래 하고파" 별의 오랜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