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 출신 천재는 왜 폭탄테러범이 됐나
[이준목 기자]
▲ JTBC <세계다크투어>의 한 장면. |
ⓒ JTBC |
유나바머(Unabomber)는 1980~1990년대 미국을 공포에 떨게 한 연쇄폭탄테러범의 별명으로 유명하다. FBI(미 연방 수사국)에 체포된 이후에는, 그가 뛰어난 지능과 고등교육을 받은 대학교수 출신의 천재적인 인텔리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전 세계를 또 한번 충격에 빠뜨렸다. 과연 무엇이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 수도 있었던 엘리트를 흉악한 범죄자로 만든 것일까.
1월 11일 방송된 JTBC <세계다크투어>에서는 'IQ 167 하버드 출신 천재 유나바머-그는 왜 연쇄 폭탄테러범이 되었나' 편을 다뤘다. 표창원 범죄연구전문가가 이날의 다크 가이드로 나섰다.
1993년 6월 2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찰스 엡스타인 캘리포니아대 유전학 교수가 본인의 집에서 배달된 우편물을 열어보다가 그 안에 장착된 폭탄이 터지면서 큰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는 미국의 세계적인 명문 예일대에서 근무하던 데이비드 겔렌터 컴퓨터공학부 교수 역시 우편물로 위장한 폭탄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또한 1994년과 1995년에는 세계적인 광고회사의 임원이던 토마스 모서, 캘리포니아 목재산업 로비협회의 회장인 길버트 머레이가 연이어 우편폭탄테러를 당하여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태가 벌어진다. 교수, 회사 임원, 협회장 등 명망있는 사회 유명인사만을 노렸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범행동기와 범인의 흔적은 오리무중이었다. FBI는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기 위하여 역사상 최대 규모의 수사인력을 투입했고 약 5만 9000권 분량의 정보를 수집하며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FBI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테러범에게 '유나바머'라는 별명을 붙였다. 유나바머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7년간 무려 16번의 폭탄테러를 저질렀고 이로 인하여 3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을 당했다. 훗날 밝혀진 그의 정체는 16세에 하버드에 입학하고 IQ 167에 이르는 수학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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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바머의 첫 범죄는 1978~1979년 노스웨스턴대학에 보낸 우편물 폭탄테러였다. 당시만해도 아마추어티를 드러내며 급조한 재료로 만든 어설픈 수제폭탄이었기에 피해자들이 가벼운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다행히 큰 인명피해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당시 유나바머가 쓴 일기에 따르면 "(피해자들이) 부상을 입거나 불구라도 되었으면 좋았을 걸"이라며 아쉬워했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나바머는 1979년 11월 15일에는 승객 80명이 탑승한 아메리칸항공 444편을 노리고 3차 폭탄테러를 저질렀다. 폭탄은 비행기 속 수화물에 숨겨져 있었고 비행기가 2000피트 상공에 있을 때 폭발할 수 있도록 고도계까지 장착하며 한층 진화된 흔적을 드러냈다. 그나마 불꽃놀이에 쓰이는 폭발력이 약한 화약을 사용한 덕분에 치명적인 피해는 면했고 불이 붙은 비행기가 빠르게 공항으로 귀환하며 대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노린 연이은 테러에 미국 국민들과 수사 당국은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유나바머라는 이름은 바로 그의 테러 대상이 된 대학(University)과 항공(Airline), 그리고 폭파범(BOOMER)을 합쳐서 탄생한 표현이다.
FBI는 대대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유나바머의 흔적을 쫓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유나바머는 일부터 타인의 체모 등 거짓단서를 남겨 수사에 혼선을 주고 무능한 당국을 조롱하기도 했다.
또한 유나바머가 무려 17년이나 꼬리를 밟히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독특한 생활방식과도 관련이 있었다. 촉망받는 영재였던 그는 미국 최고 명문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교수까지 지냈지만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이후,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고 인적이 드문 오두막에서 무려 25년 가까이 세상과 담을 쌓고 은둔 생활을 보냈다.
유나바머는 독학으로 폭탄 제조 기술을 습득했고, 갈수록 작지만 강한 위력을 가진 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는 버스로 지역을 옮겨다니며 폭탄 소포를 발송하고 은신처로 복귀하기를 반복했다. 유나바머는 훗날 진술에서 "상식적으로 붙잡힐 확률은 제로였다.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공연히 떠벌리지 않고 입단속만 잘하면 안전하니까"라고 자신만만해했다. 유나바머가 '죽음의 소포'를 언제 어디에 누구에게 보낼지 전혀 알 수 없는 미국 국민들은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유나마버는 초기에는 미국 동부의 시카고 일대에서 집중적인 폭탄테러를 자행했으나, 5차 테러를 기점으로 미국 전역으로 범위가 넓어진다. 1982년 이후 3년간 잠시 중단되기도 했던 유나바머의 테러는 1985년부터 다시 재개되며 한 해에만 네 건의 폭탄테러가 잇달아 발생해 빈도와 수위가 더 악랄해졌다. 공백기 동안 폭탄의 제조기술과 위력은 더욱 치밀하고 정교해졌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어떤 원한관계도 없었고 자신이 왜 범행타깃이 되었는지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1985년에는 안타깝게도 끝내 첫 사망자가 발생하고 말았다. 11차 테러였던 12월 11일, 컴퓨터 매장의 사장이었던 휴 스크러턴이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훗날 희생자는 과거 대학 재학 시절 유나바머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는 학생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제자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유나바머의 일기에는 "훌륭하다. 인도적인 살인방법을 찾았다"고 기술해놓았다.
FBI는 용의자의 정체를 해고된 비행기 정비공, 금속공학 분야의 외로운 노동자, 원한이 있는 고학력의 정치투사 등으로 다양하게 추정했으나 모두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현대적인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이 발전하지 못한 탓에 경험에만 의존했던 수사의 한계였다. 장기간 최대 규모의 인력과 자금을 투입하고도 좀처럼 수사가 진척이 없자 미국 여론은 들끓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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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 시작 이후 9년이 지난 1987년이 되어서야 유나바머에 대한 첫 목격자가 등장했다. 유타에서 벌어진 12차 테러 당시 수상한 나무상자를 내려놓고 가는 남자의 모습이 한 가게 직원과 손님에게 목격됐다. 우리에게 알려진 유나바머의 유명한 몽타주도 이때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 씁쓸하게도 유나바머가 유명세를 타면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는가 하면, 이 몽타주가 그려진 티셔츠, 컵, 가방 등의 상품이 등장하여 판매되기도 했다.
열여섯 번에 걸친 유나바머의 테러 희생자들을 분석해보면 대체로 과학기술과 산업사회 분야에 기여한 전문가들이 집중 타깃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유나바머는 편지를 통하여 자신의 범행동기와 사상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14차 테러의 희생자인 데이비드 겔런터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는 "당신은 발전이라는 게 불가피하다고 설명했지만 그것은 당신같은 테크놀러지 광신도들이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를 통하여 유나바머가 현대 산업사회에 대한 강한 증오심을 지닌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나바머는 1995년 6월에는 미국의 유력언론인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등에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신념을 피력한 선언문을 기고하면 테러를 중단하겠다는 제안을 전한다. 그 분량은 무려 3만 5000자(200자 원고자 800장 이상)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이었다.
'테러범과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가진 FBI는 유나바머의 제안을 두고 고심했으나 선언문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긴 선언문이 공개될 경우 이 글을 누가 썼는지 알아보고 작성자에 대한 제보가 들어올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1995년 9월 19일 <워싱턴포스트>에 8장 분량에 이르는 유나바머의 선언문 전문이 게재됐고, 여기서 유나바머는 현대산업사회의 만행을 강하게 비판하며 '산업시스템에 항거하는 혁명'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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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한 통의 제보전화가 모든 상황을 바꿨다. 제보자는 데이비드 카진스키라는 인물이었고, 그가 유나바머로 의심한 사람은 놀랍게도 바로 그의 친형이었다. 데이비드는 유나바머의 선언문을 읽고 깜짝 놀라 친형의 편지와 글을 분석한 결과 유나바머가 바로 동일인물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테러범 유나바머의 정체는 바로 테드 시어도어 카진스키였다. 20대 중반에 대학 교수직을 퇴임한 카진스키는 은둔생활을 시작하며 가족들이 보내준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친동생이 제보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데이비드의 가족은 세간의 관심에 시달려야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인 피해를 막기 위하여 친형을 신고한 데이비드의 용기 덕분에 테러범 유나바머의 정체가 세상에 공개될수 있었다.
카진스키가 참여한 'MK 울트라 프로젝트'
카진스키는 왜 테러범이 되었을까. 의외로 카진스키의 지인들은 그가 어린 시절에는 조용하고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는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주장한다. 카진스키의 이력과 범행동기를 추적하면서 그가 하버드 대학시절 심리학자 헨리 머레이 교수가 주도한 'MK 울트라 프로젝트'라는 심리실험에 참여했었던 행적이 주목받았다. 이는 극심한 스트레스 상황 속에 실험자를 몰아넣고 그 반응을 관찰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실험관들은 카진스키의 모든 생각이나 논리를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인격적인 모욕까지 서슴지 않았다. 카진스키는 놀랍게도 이러한 심리실험을 무려 3년간이나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카진스키의 지인들은 이 실험 이후 카진스키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에 반박하는 주장들도 적지 않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이 심리실험이 카진스키가 테러범이 된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기에는 인과관계를 연결시키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머레이 교수의 심리실험에 참여했던 인물은 카진스키만이 아니었고, 대다수는 실험 이후에도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카진스키 본인도 하버드의 심리실험이 자신에게 전혀 유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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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진스키는 우수한 지적능력에 비하여 사회성이 부족한 인물의 전형이었다. 카진스키는 조교수 시절에도 대인관계나 학생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던 만큼, 엘리트 학자 사회에 적응하기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학교를 퇴직한 이후에는 가족이 운영하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만나 사귀게 된 여성과 관계가 틀어지자 그녀를 비난하는 메시지를 공장 곳곳에 도배하여 가족들을 난처하게 만들기도 했다.
카진스키는 유나바머로 범행을 거듭하면서 폭탄에 'F.C'라는 고유의 시그니처를 남기기 시작했다. FBI는 이 문구에 어떤 숨은 메시지가 있는지 연구를 거듭했지만, 카진스키가 밝힌 바 따르면 이는 'Freedom Club'의 약자로 드러났다. 실제로는 1인 테러범이었던 카진스키가 마치 단체활동을 하는 것처럼 위장한 이유는,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한 의도도 있지만, 고독한 삶을 살았던 카진스키의 내면에 추앙받는 조직의 리더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낸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FBI는 유나바머 카진스키를 17년 만에 생포하는 데 성공했다. 세상에 드러난 그의 정체는 덥수룩한 수염에 긴 머리, 세상에 단절된 은둔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FBI는 그의 은신처에서 선언문을 작성한 타자기와 폭탄 재료 등 각종 증거들을 확보했다. 카진스키가 거주하던 오두막은 지금도 범죄연구에 필요한 사료로 보존되어 있다.
카진스키는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카진스키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들은 그의 범죄를 조현병이라는 정신적인 문제로 몰아가서 감형을 받으려는 전략을 내세웠다. 하지만 카진스키는 오히려 이에 반발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자신이 목숨을 건지기 위하여 미치광이 취급을 받게 되면 이제껏 자신이 지켜온 모든 신념과 행동이 물거품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카진스키는 변호인을 해임하고 극단적 선택까지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카진스키는 자신이 저지른 테러의 당위성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유죄를 인정했고 법원은 그에게 가석방이 없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카진스키는 지금도 감옥에서 복역중이다. 그리고 동생 데이비드는 형을 제보하여 받은 포상금 100만 달러를 전액 모두 테러 희생자들에게 기부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통하여 대신 속죄의 마음을 전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성공과 경쟁 위주의 교육을 강요받으면서 성장 과정에서 사회와 인성발달의 중요성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그 과정에서 사회화에 실패한 사람들 일부는 극단적인 범죄의 늪에 빠져들기도 한다.
테러범이 된 천재 유나바머 역시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유나바머는 자신이 미래를 예측한 선구자로 평가받기를 원했겠지만, 정작 그 실체인 테드 시어도어 카진스키의 본질은, 어쩌면 경쟁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고 괴물의 가면 뒤에 숨어버린 나약한 인간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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