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제주 변호사 살인' 사건 파기환송… 살인죄 무죄 취지
[아시아경제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제보가 계기가 돼 검거된 '제주 변호사 살인' 사건의 50대 피고인에 대해 살인죄의 공동정범 성립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12일 대법원 2부(주심 대법관 천대엽)는 1999년 발생한 '제주 변호사 살인' 사건과 관련해 살인 및 협박 혐의로 기소된 김모씨(57)의 상고심에서 살인죄와 협박죄 유죄를 인정, 징역 12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의 제보 진술은 주요한 부분에 관해 객관적 사실과 배치되는 사정이 밝혀졌고, 나머지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위한 다른 추가 증거·근거가 충분히 제출됐다고 보기도 어려우므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정도의 신빙성을 갖췄다고 볼 수 없고, 범행 현장 상황 등 정황증거만을 종합해 피고인에게 살인의 고의 및 공모 사실을 인정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와 달리 피고인의 제보 진술과 정황증거만으로 공소사실을 유죄로 판단한 원심판결에는 형사재판에서 요구되는 증명의 정도, 진술의 신빙성 판단, 살인죄의 고의 및 공모 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반해 자유심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거나 공소사실의 인정에 필요한 충분한 심리를 하지 않아 중대한 사실오인을 함으로써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파기환송의 이유를 밝혔다.
'제주 변호사 살인' 사건은 1999년 11월 5일 제주시 거리에서 이승용 변호사가 칼에 찔려 살해된 사건이다.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던 이 사건은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완성됐다고 착각한 김씨가 2019년 10월 후배를 통해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 사건에 관해 제보하면서 반전을 맞았다.
김씨는 SBS PD인 A씨와의 전화 통화에서 자신이 범행에 관여한 사실을 제보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뒤 자신이 머물던 캄보디아 씨엠립에서 대면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제주도 폭력조직 두목 백모씨가 이승용 변호사를 겁주고 다리를 찌르라고 사주했고, 부산 친구이자 별명이 갈매기인 손모씨와 내가 공모했다'고 답변했다. 또 '손씨가 이 변호사를 찔렀는데 일이 잘못돼서 사망하게 됐다'고도 했다. 손씨는 이미 2014년 8월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 같은 내용은 모두 촬영돼 2020년 2회에 걸쳐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영됐다.
그런데 방송이 나간 뒤 경찰이 방송 내용을 토대로 김씨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하자 김씨는 경찰 수사가 A씨와 진행한 인터뷰 때문이라는 생각에 여러 차례에 걸쳐 A씨에게 "내가 곧 한국 간다. 네가 나를 두번 죽였으니 내가 반은 갚아줘야 우리 인연도 끝이 난다"는 등 협박 메시지를 보냈다.
캄보디아에 불법체류 신분으로 머물던 김씨는 지난해 6월 현지 당국에 적발돼 국내로 송환됐고, A씨에 대한 협박과 이 변호사에 대한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김씨의 협박 혐의에 대해서는 1심과 2심 모두 유죄가 인정됐다.
하급심에서는 살인죄의 공소시효도 쟁점이 됐다. 형사소송법상 법인이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국외에 있는 경우 공소시효가 정지되는데, 김씨는 개정되기 전 형사소송법에 따를 때 2014년 11월 5일 15년의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됐다고 주장했다.
김씨는 자신이 2014년 3월 19일 마카오로 출국해 이듬해 4월 18일까지 체류한 사실은 있지만 '형사처분을 면할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소시효가 정지되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씨의 살인 혐의에 대해서는 1심과 2심의 판단이 달랐다. 직접 살인을 실행한 손씨가 사망한 상황에서 범행 당시 김씨가 사전 공모와 기능적 행위지배를 통해 손씨와 함께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볼 수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쟁점이 됐다.
1심은 김씨의 살인 혐의를 무죄로 판단, 협박죄 유죄만 인정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당시 살인 정황에 대한 김씨의 여러 진술들을 검토한 뒤 "검사의 주장과 같은 추론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일정 부분 설득력도 있어 보인다"면서도 "그러나 범죄의 구성요건인 고의 및 공모공동관계를 추단하기 위한 사정은 엄격한 증명에 의해 인정돼야 할 것인데, 이 사건에서 피고인이 성명불상의 윗선으로부터 지시를 받았는지 여부와 그 내용을 인정할 수 있는 직접증거는 오직 피고인 진술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검사가 유죄의 결론에 이르게 된 근거들 중 상당부분은 단지 가능성에 관한 추론에만 의존한 것으로서 이를 인정할 증거가 없고, 주범의 범행 경위에 관한 사정 및 그 밖의 사정만으로는 현장에서 피해자를 살해한 주범으로 파악되지 않은 피고인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하고 이 부분 공소사실과 같은 살인 범행의 고의 및 그에 대한 기능적 행위지배를 추단하기에 충분치 않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2심의 판단은 달랐다. 2심은 1심이 무죄로 판단한 살인 혐의를 유죄로 판단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이 부분 공소사실 기재와 같이 손씨와 공모해 피해자를 살해한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라며 "그럼에도 원심은 이 부분 공소사실을 무죄로 판단했으니, 원심판결에는 사실오인 등의 위법이 있다고 할 것이고, 이를 지적하는 검사의 주장은 이유 있다"며 1심 판결을 파기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사망의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위험헝을 인지하고도 손씨에게 칼을 이용해 피해자의 다리 등 신체의 주요 부위에 기능상 장애를 초래하는 수준의 상해를 가하는 범행을 지시했다고 봤다.
재판부는 김씨가 ▲살상력을 높이기 위해 손씨가 조직폭력배들이 치명상을 방지하고자 할 때 흉기에 테이프를 감는 등의 '예방적 조치'도 없이 특별히 제작된 칼을 범행수단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범행을 지시한 점 ▲손씨로부터 피해자에 대한 미행과 뒷조사를 통해 파악한 정보를 전달받은 점 ▲범행 후 손씨에게 도피자금을 제공한 점 등을 토대로 김씨와 손씨가 범행을 공모할 당시 적어도 피해자가 사망할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한 미필적 인식이나 예견을 하고 이를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 즉 '살인의 고의'가 인정된다고 봤다.
재판부는 "범행에 대한 본질적 기여를 통한 기능적 행위지배를 통해 실행행위를 분담했다고 인정할 수 있으므로, 결국 피고인은 살인죄의 공동정범의 죄책을 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다시 결론을 뒤집었다.
재판부는 먼저 "형사재판에서 범죄사실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갖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해야 하므로, 검사의 증명이 그만한 확신을 가지게 하는 정도에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설령 유죄의 의심이 가는 사정이 있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전제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1999년 여름 백씨로부터 이 변호사를 혼내주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지만, 백씨는 1999년 11월까지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고 ▲김씨는 범행 이틀 후 손씨를 서울로 올려보냈고, 이후 4~5년간 제주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진술했지만 2001년 8월 손씨가 제주시에서 차량 통행 문제로 지나가던 행인과 말다툼을 하다가 상해 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확인되는 등 김씨의 진술 중 객관적 사실과 명백히 배치되는 부분들을 지적하며 "피고인의 제보 진술이 형사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만한 신빙성을 갖췄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피고인 제보 진술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나 구체적 정황도 존재하지 않는다"며 "특히 피고인은 직접 실행행위를 하지 않은 공동정범으로 기소됐으므로, 피고인의 기능적 행위 지배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범죄 실현의 전 과정을 통해 행위자 각자의 지위와 역할이 구체적으로 입증돼야 하는데, 손씨의 실행행위에 관한 피고인의 진술을 뒷받침할 만한 객관적 증거나 구체적 정황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은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피고인의 진술이 형사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을 배제하고 공소사실을 입증할 만한 신빙성을 갖췄는지에 관해 보다 신중하게 판단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무죄추정의 원칙을 강조한 판결"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직접적인 증거 없이 간접증거만으로 살인의 고의 및 공동정범을 인정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해 유사한 사안에서의 하급심에 지침을 제시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는 판결"이라고 말했다.
최석진 법조전문기자 csj040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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