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정의구현사제단 함세웅 신부가 말하는 정의
[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소위 유신헌법이라는 것은 (...) 폭력과 공갈로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다.”
1974년 7월23일 유신헌법을 규탄하는 ‘양심선언’이 발표되고, 그 일로 지학순 주교가 징역 15년을 선고받는다. 천주교 신부들을 중심으로 구명운동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된다. 그 중심에 선 인물 중 하나가 함세웅 신부.
‘행동하는 양심’을 표방했던 그는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시대의 엄혹함 속에서 소신을 감추지 않았다. 각종 시국사건에 연루돼 투옥의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지금껏 그 소신 표명을 이어오고 있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라의눈)는 그런 함세웅의 역사관이 담긴 시대의 기록이다. 평생 사제와 투사의 길을 걸어온 함세웅의 관점으로 우리 근현대사를 되짚는다. 책은 우리 근현대사를 쉰두개 장면으로 압축한다.
시작점은 1945년 8월15일 해방일이다. 그는 “해방은 1945년 8월16일 하루뿐이었다”라는 일각의 주장에 동조하며 “해방의 기쁨은 찰나였고, 역사는 우리 민족에게 길고도 큰 대가를 요구했다”고 강조한다. 특히 해방 이후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계열로의 분리, 이승만, 여운형, 김구 등이 연합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생각이 다르더라도 대의를 위해 모두가 함께했더라면”, “상해 임시정부에만 기대했던 미숙한 판단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아쉬움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그는 맥아더 연합군사령부의 잘못된 판단으로 우리 민족공동체 누구도 원치 않는 민족분단과 좌우 갈등이 빚어졌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업적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인물을 수면으로 끌어올린다. 대표적 인물이 박재표 순경이다. 1956년 정읍군 소성지서에서 근무하던 당시 스물다섯 살 박재표 순경은 집권 여당의 투표함 바꿔치기 행태를 고발해 이승만 정권의 부정 선거를 밝혀낸 인물. 그는 1956년 8월13일 제2대 지방의원 선거 당시 투표함을 개표소로 옮기는 과정에서 사복 경찰관들이 투표함 봉인을 뜯고 투표용지를 바꿔치기한 사실을 직접 목격했다고 기자회견을 열어 큰 파문을 일으켰다.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졌다’는 유행어가 나돌 정도로 불신이 커진 민심에 박 순경이 일으킨 파문은 크게 번졌다. 하지만 박 순경은 직무유기죄로 구속돼 1년6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출소 후 취업이 제한됐음은 물론, 가족과 형제, 사촌과 조카들도 연좌제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함 신부는 “박재표 순경이 부정선거를 고발한 8월27일을 경찰의 날로 기념하기 바란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당시 부정 선거는 투표함 바꿔치기였지만, 지금은 미디어라는 형태로 정보를 왜곡하고 여론을 호도한다”며 “우리 스스로 제2, 제3의 박재표가 되도록 굳게 다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의 종교적 관점이 반영된 해석도 눈에 띈다. ‘어떠한 이유로든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가르침에 관해 그는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이후에 (천주교계는) 새롭게 접근한다”며 “죽음은 영원과 만나는 순간으로 하느님의 영역이기에 자살한 분들을 위해서도 합당하게 장례미사를 봉헌하고 교회 묘지에 모실 수 있도록 허용했다”고 설명한다. 자살은 사람이 아닌 신이 판단할 영역이라는 말이다. 그는 “전태일은 ‘함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쳤다”면서 “(그럼에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의 불안 속에 살아가고, 위험의 외주를 맡은 노동자들은 생명의 위험 속에서 살아간다”고 우려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관한 의견도 흥미롭다. 함 신부는 “사람들은 질투심에 눈이 멀어 돌발 행동을 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며 “그(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직언을 서슴없이 했던 유일한 사람이다. 시종일관 독재에 이의를 제기했고, 유신체제에도 반대했다. 심지어 감시 대상인 장준하 선생 가족을 도와주기로 했다”고 말한다. 함 신부는 김재규가 부마항쟁 당시 성난 민심을 목도하고 유신체제의 종말을 예견했다며 그가 부마항쟁의 세례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김재규 재판 당시 함 신부는 그의 규명을 위해 인권변호사들과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동부이촌동 성당에서는 직접 구명 서명을 받기도 했다.
“우리 사회는 김재규의 평가를 유보하고 있다.” 함 신부는 김재규에게 내려진 ‘내란 목적 살인죄’는 사법 살인이라며 “우리 사회는 아직도 김재규에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국민들이여,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란 김재규의 법정 최후진술처럼 아울러 지금의 민주주의에 그의 공이 크다는 것이다. 아울러 김재규와 함께했던 박선호 의전과장, 비서실장 박흥주 대령, 유성옥 운전기사, 이기주 경비원, 김태원 경비원을 기억해야 한다고 첨언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추천사를 통해 “(함 신부는) 구약성서의 선지자들처럼 독재와 불의를 꾸짖는 시대의 선지자였고, 지금도 우리의 양심을 깨우고 있다”며 “(이 책은) 역사를 통해 과거를 배우고 오늘을 해석하며 내일을 바라보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 | 함세웅 지음 | 라의눈 | 480쪽 | 3만50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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