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만난 사람]맥아더를 존경하던 소년, 정의구현사제단 신부가 되다
[아시아경제 서믿음 기자] 6·25 전쟁통에 빗발치는 북한군의 포격을 피해 아홉 살 난 소년은 용산신학교 내 성모병원으로 몸을 숨겼다. 병원 안은 각종 부상에 신음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소년은 삶의 허무를 느끼고 그길로 가톨릭 신자가 된다. 이후 가톨릭신학교를 졸업한 후 로마 유학길에 올라 신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은 소년의 세계관이 꿈틀하는 계기가 됐다. 역사관의 변화가 그 일례. 맥아더 장군을 영웅시했던 아이는 "우리 민족이 피 흘린 전쟁에서 큰 이득을 취한 (미국이) 고맙기만 한 나라가 아닐 수 있다"는 의문을 품고 귀국했다.
귀국 후 그의 삶은 격변한다. 군사 독재로 엄혹했던 1974년 반체제 인사들이 국가 전복을 꾀했다는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행동에 나섰다. 뜻을 같이하는 동료 신부들과 함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해 독재에 항거했다. 이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적잖은 수감 생활을 이어가며 시국사건마다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제가 세속의 일에 너무 깊게 관여한다는 우려 속에서도 교육자, 성직자, 사회운동가, 작가 등의 외피를 두르고 투쟁하는 신부의 길을 걸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최근 자신의 역사관을 담은 저서 ‘함세웅의 붓으로 쓰는 역사기도(라의눈)’를 펴낸 함세웅 신부를 10일 만났다.
-교육가, 작가, 사회운동가, 성직자, 이사장 등 다양한 호칭을 지닌다. 함세웅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호칭은.
▲사제다. 어떤 일을 하든 그 사실엔 변함이 없다. 일각에서 저를 ‘투사’로 묘사하기도 하는데 이건 삶의 결과에서 나온 다양한 호칭의 하나일 뿐이다. 본질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길을 따르며 교회 공동체와 이웃을 위해 평생을 바친 사제다. 억울한 이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헌신하겠다고 제단 앞에 엎드려 결심했다.
-일부에서는 ‘좌 성향의 신부’라고 말한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으로 쫓겨갔던 드골이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서자 한 기자가 물었다. "드골 장군님은 우파시죠?" 드골은 "아니오"라고 답했다. 이어 "혹시 좌파입니까"라고 물으니 드골은 "내가 어찌 좌파일 수 있겠소"라고 답했다. 기자는 "그러면 중도란 말씀입니까"라고 물었고, 그는 "나는 그 모든 것들 위에 있소"라고 답했다. 교만하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느 파벌에 종속되지 않고 국민을 껴안으려 한 점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신앙인의 자세도 마찬가지다. "당신은 좌인가 우인가"를 묻기보다는 "나는 양심에 따라 살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질문의 대상은 늘 자신이 먼저여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인)의 참된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우리 사회에서 종교인의 역할’이라는 말 자체가 ‘종교인은 정해진 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한계를 설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 한계를 단호히 거부한다. 종교인은 현실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만들고 그 뒤에 숨은 자들은 대부분 맘 편히 불의를 저지르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본다. 종교인은 성전에서 기도할 때보다 어려운 이웃, 불의에 고통받는 약자들과 함께할 때 더 큰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부름과 예수님의 삶에 응답하는 사제의 길이라 믿는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결성에 참여해 인권·민주화 운동에 힘써왔다.
▲1970년대까지 한국의 가톨릭은 세계를 등지고 살았다. 세상 속에 뿌리내리는 넓은 교회관을 가지지 못했고 독재에 침묵했다. 그러다가 유신 독재에 맞서 피 흘리고 감옥에 간 청년 학생들을 지켜보던 사제들이 지학순 주교님을 중심으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했다. 자신을 헌신한 청년 학생들이 사제들을 역사의 현장으로 이끈 것이다. 교회는 결코 성전의 건물이 아니다. 교회의 영역은 더 확장돼야 한다. 삶의 현장이 모두 교회이며, 우리의 삶 속에 하느님의 뜻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종교가 정치에 너무 깊이 개입한다는 지적도 있다.
▲종교 자체가 정치이고, 정치 자체가 종교다. 종교의 회합, 설법, 설교, 강론이 모두 정치적 행위이고 사회적 언어다. 이분법적 구분은 오류다. 중세 가톨릭은 교황권이 곧 국가권이었다. 실질적으로 교회가 국가를 지배했다. 이후 인문학, 시민운동을 통해 정교 분리가 이뤄졌지만, ‘분리’란 말에도 어폐가 있다. 애초에 한 몸인 정치와 종교는 분리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독실한 신앙인이 악에 동조하거나 때로는 앞장섰다.
▲여러 차례 감옥에 다녀왔는데, 당시 저를 무섭게 조사했던 분 중에도 분명 신앙인이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무섭게 윽박지르며 조사하던 수사관이 아내의 전화를 받더니 천사로 변해 ‘아이들은 잘 노냐? 어머니는’하며 살가운 대화를 나누더라. 우리 안에 선성과 악성이 병존한다는 깨달음의 순간이었다. 인간은 마땅히 선성을 키우고 악성을 누르며 덕인의 삶, 신앙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 나아짐이 있었지만 아직도 더 나아가야 할 길이 놓여있는 듯하다.
▲언제나 바른 선택이 중요하고, 우리 공동체가 잘못을 선택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사제들은 하느님 앞에서 목숨을 걸고 이웃에 봉사하겠다고 서약한다. 그 약속을 충실히 해내도록 다짐하고, 그 약속이 약화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채찍질해야 한다. 저는 이미 선배 세대가 됐다. 후배 세대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그걸 입 밖에 내는 순간 꼰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제가 사제단을 평가하고 미래 역할을 정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우리 세대는 최선을 다했으며, 미래 세대는 미래 세대의 몫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열사들이 ‘자살은 죄’라는 종교적 관점으로 지적받기도 한다.
▲십계명은 살인을 금하고 있다. 살인의 대상에는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 포함된다. 그런 이유에서 과거 가톨릭은 스스로 목숨을 버린 이들의 장례를 치러주지 않았다. 하지만 1960년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 죽음은 하느님과 만나는 영원한 순간이니 인간이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께 맡기자는 결정이 내려졌고, 이후 미사를 모실 수 있게 됐다. 물론 단순 저항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그 판단을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책무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재규의 명예 회복이 이뤄져야 한다고 했는데.
▲김재규가 의로운 군인이었다고 평가한다. 박정희가 유신 독재 하는 동안 직언한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부마항쟁의 인파 속에서 혁명의 기운을 체험했다. 시민 항쟁임을 직감한 것이다. 강신옥 변호사에 따르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차지철과 박정희의 대화를 듣고 결심을 굳혔다. "캄보디아처럼 이삼백만명만 탱크로 밀어버리면 된다"라는 차지철의 말에 박정희는 "4·19 때야 발포 명령을 내린 최인규 내무장관과 곽영주 경무대 경찰서장이 사형을 당했지만, 지금이야 내가 발포 명령을 내릴 건데 누가 어쩔 거야"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구명을 위해 오래 노력했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이를 받아들일 만큼 성숙하지 못한 듯하다. 그의 명예 회복이 이뤄질 때 진정한 대한민국의 민주화가 이뤄졌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노동운동이 임금인상에 치중하고 있다고 했는데.
▲1970년대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권익뿐만 아니라 인권, 민주, 남북 평화공존을 위해 헌신했다. 다만 1980년대 6·29 선언으로 민주정권이 수립된 이후의 노동운동은 임금인상에 치우친 면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판단한다. 저를 이상주의자라고 할지 모르지만, 대기업 노동자와 노조 간부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자신들의 임금에서 아주 작은 일부라도 떼어서 비정규직, 외주 노동자, 여성 노동자, 노조에 가입하지 못한 노동자들을 위해 나눔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이다. 그렇게 기업가와 정치인들에게 감동을 주면 소외된 노동자들과 함께 행복한 세상이 오리라 믿는다. 그것이 성서가 가르치고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사랑과 자비, 나눔의 가치다.
-지금의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라보나. 무엇을 가장 우려하나.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 평화공존이 가장 큰 가치다. 어떤 이유든 평화공존을 깨거나 반대하는 것은 비인간적 행위이고 역사에 대한 도전이다. 최근 윤석열 정부는 ‘자유’를 강조하고 있지만, 자유를 ‘반공’과 동의어로 쓰고 있는 듯하다. 우리에겐 분단의 역사를 넘어 남북이 평화롭게 사는 길이 바로 자유다. 7·27 정전 협정 이후 70년이 흘렀다. 성서에서 70년은 은총의 해, 복된 해다. 하루빨리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어 새로운 평화공존으로 나아가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 함세웅 신부는
▲가톨릭 신부이자 교육자, 작가, 사회운동가다. 지학순 주교 구속을 계기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결성해 본격적인 인권회복과 민주화운동에 힘썼다. 독재정권 속에서 소신 발언을 아끼지 않으면서 중앙정보부에 끌려다닌 끝에 두 번의 옥고를 겪었다. 사제가 세속의 일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통념을 깨고 굵직한 시국 사건 때마다 존재감을 드러냈다. 2012년에 은퇴 한 후 현재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와 민족문제연구소, 인권의학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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