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관계를 구매하는 시대 [쿠키칼럼]

전정희 2023. 1. 1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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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한 이래 원룸과 다세대주택을 전전하다가 얼마 전 처음 아파트에 입주했다. 지어진 지 20년 정도 되었고 500세대가 함께 거주하고 있으며 주로 젊은 부부나 노인 가구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다.

이사한 지 석 달 정도 되었는데 그동안 얼굴을 익힌 이웃은 없다. 아파트에 이사를 왔다면 으레 앞집에 떡을 들고 가 인사하는 것이 마땅한지 고민하다가, 요즘 시대에는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도 결례고 코로나 시국에 음식을 나누는 것도 애매하다는 생각이 들어 단념했다.

무려 500가구가 서로 마주보며 살고 있지만, 아파트 주민들이 함께 무언가를 하는 일은 일주일에 한 번 분리수거일로 지정된 요일에 자기 집 쓰레기를 버리러 나올 때뿐이었다.

인간관계를 선택하고 구매하는 ‘고립의 시대’

개인주의가 새로운 세대만의 특징처럼 여겨지던 것은 옛날의 이야기다. 가족, 이웃, 학교, 직장 등 나의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던 관계’는 전방위적으로 약화됐다. 1인 가구, 도시의 익명성, 비대면 수업, 회식의 종말과 재택근무가 대신 자리를 잡았다.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큐레이션하는 방식으로(그리고 때로는 비용을 지불하여) 인간관계를 채워야 한다. 이것을 인간관계에서 개인의 자기주도성이 강화되었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고, 다른 측면에서는 고립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가속화되도록 코로나가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지만 팬데믹이 극복된다고 해서 과거로 되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

영국의 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외로움 경제’라는 말로 우리 시대를 설명한다. 그의 저서 ‘고립의 시대’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나타나는 외로움의 현상과 그로 인해 생겨난 수요, 그에 대응하는 상품들을 분석했다.

시간당 40달러로 살 수 있는 ‘친구 서비스’는 마치 음식 배달을 시키는 것처럼 플라토닉한 대화 상대를 제공한다. 다양한 기업에서 상업적 공유 주거공간을 판매하는데, 그 상품의 핵심은 이웃의 존재와 공동체의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공유오피스는 동료가 없는 긱 이코노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공간’을 판매한다.

요즘 사람들은 친구를 피곤해하고 이웃을 부담스러워하며 동료와 함께하는 회식을 노동이라고 여기지만, 한편으론 그런 관계의 경험을 구매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할 의사도 있는 것이다.

한국도 다르지는 않다. 유료 독서모임 ‘트레바리’의 성공신화가 알려진 지도 2년이 지났고(“읽고, 쓰고, 대화하고, 친해져요!”), 취미나 배움을 매개로 인간관계의 기회를 판매하는 수많은 플랫폼이 생겨났다.

나의 SNS 피드에도 자주 광고로 뜨는 공유주거공간 ‘에피소드’와 같이, 이웃 공동체를 이뤄 ‘함께 사는 경험’을 판매하는 공간들도 늘어나고 있다(“매력적인 이웃을 소개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상품들의 가격이 만만찮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레바리의 독서모임 한 개에 멤버십을 갖기 위해서는 20~30만 원 이상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모임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비용이 설정되는 것 자체가 그 모임의 매력이 되기도 한다. 한 유튜버는 사람들이 트레바리에 참여하는 이유가 “이만큼의 돈을 지불할 정도로 (교양 있는 모임의)가치를 느끼는 사람들이 오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호텔처럼 고급스러운 공유주거 공간이 ‘매력적인 이웃’을 제공한다고 광고할 수 있는 까닭도 그 공간에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나가 아닌, 일정 이상의 소득과 문화자본을 가진 이들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인간관계를 제공하는 상품들은 당신이 원하는 정도로 교양 있는, 소득 수준이 높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이어준다고 말한다. 높은 비용은 일종의 장벽이 되어 자격 없는 사람이 그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줄 것이다.

친구를 사귀고 타인과 대화하기 위해 돈을 내야 하는 사회라면 당연히 누군가는 배제된다. 물론 이전에도 사람들은 끼리끼리 어울렸다. 잘 사는 동네에는 잘 사는 사람들끼리 살았고 소위 좋은 학교에는 중산층은 되는 집안의 자녀들만 모였다.

하지만 오프라인에서의 ‘주어진 인간관계’가 약화될수록,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교류하는 현상은 더 심화되는 듯 보인다.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어졌고 나와 취향이 맞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선택해 사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소셜미디어는 나와 문화적 취향이나 정치적 입장이 비슷한 사람들만 골라 연결해준다. 이제 보기 싫은 사람이나 듣기 싫은 이야기는 너무 쉽게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취향이 맞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쉽게 맺고 끊을 수 있는 관계를 맺는 것은 편한 방식이다. 설령 비용을 지불해야 할지라도 (그럴 수 있는 소득이 있다면)그게 더 편안할 것이다. 고전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관계의 즐거움 뿐 아니라 서운함, 갈등, 돌봄, 감정노동과 같은 ‘피곤한’ 과정이 따라붙는다.

게다가 나와 비슷한 사람을 골라 선택한 것이 아니므로 상대와의 차이를 좁히느라 애써야 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런 피곤한 관계 속에서라야 우리는 외로움에 반대되는 것,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느낄 수 있지 않은가.

분명한 목적성 속에서 큐레이션된 관계는 한편으로 얼마나 허무하며, 클릭 한 번으로 맺고 끊어지는 관계 속에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이질적인 사람들끼리 만날 일을 일부러 만들어야

가장 큰 문제는,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현상이 심화될수록 사회는 통합의 반대편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하지 않은 상대에게 공감하기 어려워하고 때로는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이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이민자에 대한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결국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끼리 부딪히고 섞이게끔 하는 것이 사회 갈등을 줄이기 위한 최선책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기업들은 그런 수요를 충족시키는 상품을 내놓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로 이질적인 사람들끼리 만나고 대화하게끔 하는 역할은 공공의 영역에서 해내야 한다. 이를테면 20대 여성인 내가 이웃에 사는 70대 할아버지와 대화할 일이 ‘일부러’ 있도록 만드는 정책이 있어야 한다.

우연한 만남의 계기가 만들어지도록 설계된 공원과 공공시설이 필요하고, 동네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는 저렴한 프로그램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저 시설과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 뿐 아니라 공공영역과 지역주민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사람, 인력을 배치하고 양성하는 것도 병행돼야 한다.

다양한 연령대와 관심사를 가진 주민들이 함께 토의하고 실질적인 결정에 기여할 기회를 제공하는 참여제도 역시 중요하다. 팬데믹으로 가속화된 고립의 시대, 이제는 공공정책에서 ‘소셜 믹스’와 ‘네트워킹’이 분명한 목표로 세워지길 바란다.

강민진 청년정의당 전 대표 contact.minj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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