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금융사]로스차일드 가문과 미국 금융 시스템의 완성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미국에서 하나의 상징이었다. 미국이 자체 금융시장을 개발하기 전, 만약 유럽에서 자금이 유입되지 않았다면 미국의 상품거래나 채권발행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럽 자금시장의 중심에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었다. 창시자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1836년 숨을 거두면서 규모가 밝혀지지 않은 막대한 자산을 남겼다. 그의 유산은 미국 대리인 어거스트 벨몬트(1813~1890)를 통해 미국의 산업 성장을 지원하는 풍부한 자금이 됐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미국에 진출한 것은 1820년대다. 유럽의 정부 대출 분야에서 지배력을 확보한 후, 로스차일드는 곧바로 미국에 관심을 돌린다. 1821년 로스차일드는 필라델피아의 필립스 은행과 제휴 형태로 미국 시장에 진입한다. 그들은 로스차일드를 위해 투자 기회를 알선하고, 새로운 고객을 소개한다. 1833년까지 로스차일드는 볼티모어와 뉴욕 등에 지점을 두었다. 이들을 통해 로스차일드는 다양한 레벨의 지자체의 채권, 운하와 광업 분야의 주식, 은행 등에 투자한다. 1834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로스차일드의 런던지점은 그동안 베어링 브라더스의 손에 있던 유럽에서 미국 정부의 은행 역할을 대표하는 권리까지 확보한다.
그런데 세계 최초의 대공황으로 알려진 ‘1837년 금융공황’은 모든 것을 바꾸었다. 공황의 여파로 미국경제도 고사 상태가 된다. 뉴욕의 로스차일드 지점도 패닉으로 폐업 상태가 된다. 이 소식을 들은 로스차일드 은행의 야심 찬 젊은 독일인 직원 어거스트 벨몬트는 그가 지시받은 아바나로 가는 대신 뉴욕으로 향한다. 그는 하늘이 내린 절묘한 타이밍을 놓칠 수가 없었다. 벨몬트는 월스트리트에 작은 사무실을 임차해 자신의 회사를 세운다. 제임스 로스차일드는 ‘그런 나귀는 짧은 끈으로 묶어야 한다’며 불같이 화를 냈지만, 결국 그를 받아들인다. 빠르게 성장하는 미국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50년 동안 벨몬트는 미국 주재 대리인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벨몬트가 만든 회사는 사실상 자본이 전혀 없이, 로스차일드 가문과의 관계만 가지고 설립됐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로스차일드와의 연줄만으로 자금을 빌릴 수가 있었다. 그는 모두가 두려워하는 침체한 시장에서 매수를 시작한다. 그는 미국이 빌려준 자금으로, 로스차일드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주식 상품, 은행어음 등을 매수했다. 이러한 매수는 부도 직전까지 몰린 은행에 단비가 됐다. 미국에서 빌린 돈으로 미국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로스차일드’라는 이름 때문이다.
국제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은행가로 자리 잡은 벨몬트는 로스차일드를 위해 돈을 벌었을 뿐만 아니라, 벨몬트 자신 또한 백만장자가 된다. 그는 처음으로 투자은행과 정치를 연결한 사람이다. 벨몬트는 정치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고, 그의 정치적 인맥 덕분에 로스차일드는 보다 많은 사업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본래 로스차일드 가문의 힘은 네트워크다. 네트워크에 기반해 환전 차익, 왕가와 정부 대출, 국공채 발행 중개 등으로 재산을 모았다. 유럽 정치의 정보를 수집하고 네트워크를 활용하면서 ‘돈이 돈을 버는’ 비즈니스를 만들었다.
벨몬트도 1840년 이후 국가적 차원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갖기 위해 민주당에 입당하고 정치에 입문한다. 그는 일본의 무역항을 개척한 유력한 가문인 페리 제독의 딸과 결혼한다. 그리고 미국 주재 오스트리아 총영사, 네덜란드 주재 미국 공사 등으로 활약한다. 1853년 미국으로 돌아온 후, 벨몬트는 민주당의 유력한 인사로 등장한다. 대통령 링컨의 가장 위험한 정치적 반대자이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시작되자 벨몬트는 링컨과 북군을 지지하고, 링컨의 재정 고문이 됐다.
그와 링컨은 남북전쟁 동안 꾸준히 편지를 교환했다. 전쟁 초기 로스차일드와 영국 정부 모두 북부연합을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벨몬트는 전쟁자금을 빌리는 데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또한 벨몬트는 전쟁 중 남부에 대한 투자를 막기 위해 유럽 은행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무엇보다 전쟁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의 대리인으로 벨몬트는 상당한 규모의 정부 채권을 사들였다. 로스차일드는 전쟁 중에 늘 그랬던 것처럼 양쪽에서 모두 돈을 벌 수가 있었다.
벨몬트는 유럽 자본과 산업국 미국 사이에 견고한 다리를 세워놓았다. 동시에 그는 금융과 정치를 맺어주었다. 그의 주된 역할은 정부자금 조달과 기업을 지원하는 자금시장에 있었다. 벨몬트를 통해 로스차일드는 미국의 정치와 유대를 맺었다. 벨몬트의 정치적 영향력은 로스차일드가 구매한 보험증권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이 권력을 잃으면서 벨몬트의 정치적 영향력도 점점 약해진다. 그에 따라 미국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력도 사라져갔다. 무엇보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은 다른 미국으로 발전한다. 1890년 아버지의 사망 후 회사를 물려받은 벨몬트 주니어는 이제 대리인이 아니다. 로스차일드의 수모를 견디며 아버지가 만들었던 회사, 어거스트 벨몬트 앤 컴퍼니의 대표가 된다. 벨몬트 주니어는 최초의 뉴욕시 지하철, 케이프 코드 운하 등에 투자한다. 벨몬트 주니어의 지도 아래 그의 은행은 미국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은행 중 하나로 남았다. 이제 미국은 로스차일드가 없이도 미국의 금융시스템으로도 자본을 조달할 수 시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백영란 역사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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