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해서 뿌려달라" 유언을 따르지 않은 결과 [가자, 서쪽으로]
[김찬호 기자]
▲ 호치민 영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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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부터 베트남에서 농민 운동이나 교육 운동을 했던 호치민은 1911년 프랑스로 떠났습니다. 배 표를 구할 돈이 없어 프랑스로 향하는 배에 견습 요리사로 취직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한 달 여의 항해 끝에 프랑스에 도착한 호치민은 프랑스 뿐 아니라 알제리나 튀니지 등 프랑스 식민지 곳곳을 돌아다녔고, 잠시 미국에 거주하기도 했습니다. 아시아계 이민자로서 호치민은 요리사나 정원사, 청소부 등 하급 노동자로 주로 생활했습니다.
베트남의 명실상부한 국부, 호치민
그의 생애가 본격적으로 변화하는 것은 1919년의 일이었습니다. 이 시기 1차대전이 끝나고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다는 것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일이죠. 한국에서는 이 시점을 기해 3.1운동이 벌어졌고,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김규식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 하이퐁 오페라극장 앞의 호치민 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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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은 곧 모스크바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레닌이 사망하고 스탈린이 집권하며, 소련은 더이상 피억압민족 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됩니다. 호치민은 중국 광저우와 홍콩, 태국 등을 오가며 베트남 공산당 창당에 나섰습니다.
▲ 호치민 영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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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본인 역시 파시즘에 반대하는 우파 세력과는 연대할 수 있다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한 바 있습니다. 결국 나중에는 미국과 전쟁을 하게 되는 호치민이지만, 2차대전기 나치와 일본에 저항하던 호치민의 지하조직은 암암리에 미국의 지원을 받아 성장한 조직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호치민의 목표는 베트남의 해방과 독립이었고, 공산주의는 현실적인 대안의 하나였을 뿐인지도 모릅니다. 피억압민족의 해방을 지원하던 레닌의 국제주의 노선과 호치민의 노선이 맞아떨어졌던 것이지요.
물론 여전히 베트남은 베트남 공산당에 의해 지배되는 공산주의 국가입니다. 민주적인 직접 선거가 치러지지 않는 국가입니다. 의회에 야당은 존재하지 않고, 극소수의 무소속 의원이 있을 뿐입니다. 그마저도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상시로 소집되지 않죠. 헌법에 프롤레탈리아의 일당독재가 분명히 새겨져 있는 국가입니다.
하지만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는 차별화된 면도 분명 존재합니다. 당권과 행정권의 분리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 당 정치국의 내각의 행정업무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습니다. 공산당 전국위원회에서 중앙위원회를 선출하고, 이 중앙위원회에서 투표를 통해 정치국 위원을 선출합니다.
그 서열 역시 득표수에 따라 결정됩니다. 장관이라 하더라도 투표를 통하지 않으면 정치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정치국에서 정부 운영의 방침을 결정하면, 실무는 내각이 담당합니다.
결국 하나의 이념을 가진 하나의 당이 정부를 지배하지만, 그 당은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할 뿐 실무에 개입할 수는 없습니다. 뚜렷한 한 명의 최고 지도자도 없습니다. 국가 주석과 국무총리, 공산당 총비서, 국회의장의 네 명이 사실상의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합니다.
▲ 호치민 영묘 옆에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라는 글귀가 적혀 있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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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유해를 화장해 언덕에 뿌려달라. 유해의 일부는 남베트남의 동지들에게 전해 달라. 유해가 뿌려진 언덕에는 방문객마다 묘목을 심게 하자. 세월이 지나면, 나무는 자라 숲이 될 것이다."
그러나 호치민의 유언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호치민의 시신은 방부 처리되었고, 베트남 통일 이후인 1975년 8월 완공된 거대한 영묘 아래에 모셔졌습니다. 모스크바의 레닌 영묘를 본따 만들어진 건물 위에는 "주석 호치민"이라는 단촐한 문구만이 새겨졌습니다.
호치민의 영묘 앞으로는 그의 유해를 보기 위한 단체 관광객들의 긴 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영묘 앞으로는 거대한 '바 딘 광장'이 펼쳐져 있고, 그 옆으로는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유리 관 안에 놓인 그의 시신은 정복을 차려입은 군인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 레닌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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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영묘 옆에 쓰여 있던,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만세"라는 글귀를 생각했습니다. 사실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은 통일 이후에 만들어진 국호입니다. 그러니 호치민은 한 번도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나라를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 북베트남의 국호는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주 상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호치민은 말했습니다. "두려운 것은 오직 흔들리는 마음 뿐"이라고요. 몇 년 만에 다시 찾아온 영묘 아래에서 호치민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여전히 그 곳에 누워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꿈꾸던 작은 숲이 아니라 화려하게 장식된 거대한 영묘 아래에서, 그의 마음조차 흔들리지 않고 있을지. 저는 그것이 여전히 의문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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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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