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랍장 전도 사고 왜 못 끊나 봤더니…"안전 규정 허점"
어린이, 노약자 다치는 고질적 문제
현실과 동떨어진 안정성 시험 절차
3년간 유명 브랜드 포함 30여개 리콜
서랍장이 앞으로 넘어지는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미국에선 이케아 서랍장이 넘어져 아동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고, 최근 국내에선 2단 서랍장이 넘어져 안전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일었다. 가구업체는 제품에 대해 안정성 검사를 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유명 기업들마저 무더기 리콜 명령을 받는 등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계속되는 전도 사고 = 서랍장이 넘어져 어린이, 노약자 등이 다치는 사고는 가정에서 벌어지는 고질적인 문제다. 세계적인 가구업체 이케아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말름(Malm) 서랍장은 1989년 출시된 이후로 전도 사고로 미국에서만 8명의 아동이 사망하며 홍역을 치렀다. 해당 제품에 대해 전 세계적으로 리콜을 진행했고, 2020년에는 유가족에게 4600만달러(약 536억원)를 지급하기로 합의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미국에서 가구나 TV가 넘어져 매년 3만3000명이 다친다고 밝혔다. 어린이의 경우 30분에 한 명꼴로 응급실을 방문하며 2주에 한명꼴로 사망한다. 어린이는 열린 서랍을 발판처럼 딛고 일어서다가 서랍장이 앞으로 넘어져 사고를 당하곤 한다.
최근 경기도 고양시에선 유명 가구업체에서 제조한 2단 서랍장이 하중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일이 발생했다. 제보자 A씨는 "옷을 채우고 문을 다 열면 서랍장이 쓰러졌고 빈 서랍이더라도 손가락 하나로 누르면 서랍장이 넘어갔다"고 했다. 서랍장을 사용 중이던 A씨의 어머니는 가까스로 쓰러지는 서랍장을 피했다고 한다. 이 서랍장의 경우 높이가 52㎝라는 이유로 안전 기준조차 없었다.
◆안정성 검사 ‘허점’ = 가정용 서랍장의 안전 규정은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기술표준원이 관리한다. 높이 76.2㎝ 이상의 목재 서랍장의 경우 사고 위험이 있다고 보고 안전 기준을 마련해놨다. 업체가 제품을 판매하려면 제3기관을 통한 안정성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전도 방지를 위한 안정성 시험은 ▲서랍 내에 하중을 가한 상태에서 모든 서랍을 작동 길이의 3분의 2까지 열고 1분 동안 전도되지 않는지 ▲하나의 서랍에 25㎏짜리 추를 매달고 3분의 2를 연 다음 1분간 전도되지 않는지 등을 따져 본다. 또한 가구가 넘어지지 않도록 벽 등 구조물에 고정할 수 있는 장치가 부착돼있거나 부착할 수 있도록 해당 부품을 제공해야 한다.
이케아 사태 이후 강화된 안전 규정이라지만 여러가지 맹점이 있다. 첫째, 높이 76.2㎝ 이상의 목재 서랍장에만 안전 규정을 정한 점. 둘째, 서랍의 3분의 2만을 열고 시험을 치른다는 점이다. 소비자가 사용할 때 가동 최대 범위까지 서랍을 여는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가구업계 관계자는 "소비자의 일상생활과는 동떨어진 형식적인 시험"이라며 "시험에 통과한 서랍장이라도 모든 서랍을 열고 맨 위 서랍을 손가락 하나로 누르면 무게중심이 이동해 쓰러지고 만다"고 말했다. 기표원은 국내 5세 남자아이의 몸무게를 고려해 2020년 안정성 시험에 적용하는 추의 무게를 23㎏에서 25㎏으로 높였다. 그러나 1개 서랍을 열고 시험을 하기 때문에 아이가 서랍을 여러 개 열어 딛고 올라서는 상황을 막기엔 역부족이다.
◆서랍장 리콜 사태 이어져 = 서랍장이 쓰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벽에 고정하는 방식도 업체의 자율 또는 소비자의 선택에 맡기고 있다. 한샘과 현대리바트의 경우 높이 76.2㎝ 이상의 서랍장을 구입한 소비자가 벽 고정을 거부할 경우 반품 처리하고 있다. 사용자가 직접 제품을 조립해야 하는 이케아는 벽 고정장치를 제공하고 안내문을 전달하는 수준이다. 이케아 관계자는 "벽 고정을 해야 기능이 가능한 고정 서랍장, 서랍 한 개를 열면 나머지 서랍이 자동으로 잠겨 안전한 인터락(Interlock) 서랍장 등을 개발했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인 노력과 투자를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단 이케아의 고정 서랍장과 인터락 서랍장은 미국, 독일, 영국 등에서 선보였고 국내 출시 계획은 아직 없다. 국내 중소 가구업체 '오피스안건사'가 하나의 서랍을 열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잠기는 서랍장을 주한 미군 기지 등에 2000여개 납품한 실적이 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안정성 검사를 비롯해 안전에 대한 책임을 사실상 업체에 떠넘기고 있는 탓에 서랍장 리콜 사태는 끊이지 않고 있다. 2020년 8개 제품, 2021년 17개, 지난해 11개 제품이 안정성 부적합 판정을 받았거나 벽 고정장치 부품을 제공하지 않아 수거·교환 등 리콜 명령이 내려졌다. 리콜 대상에는 동서가구, 에몬스, 까사미아, 일룸 등 국내 유명 브랜드의 제품들도 들어있다. 시중에서 파는 있는 제품을 무작위 추출해 리콜 여부를 결정하는 점을 감안하면, 전도 사고의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
윤명 소비자시민모임 사무총장은 "시험을 통과한 수준의 제품 안정성을 지속적으로 확보해야 하지만 원·부자재 교체 등으로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며 "영유아 사망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실제 사용자 관점으로 사고 발생 당시 상황을 고려해 안전 규정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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