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목사에게 기본소득을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서울남연회는 지난해 4월 제33회 연회를 열고 ‘웨슬리 선교기금’ 조성 여부를 논의했다. 당시 회의에서 소개된 기금의 조성 취지와 운용 방법은 다음과 같았다. 연회 소속 자립교회들은 매년 연간 재정의 1.7%를 연회 본부에 납부한다→이 돈에 일부 교회의 헌금과 연회 본부 예산을 보태 매년 10억원 넘는 기금을 조성한다→기금을 통해 연회 소속 미자립교회 178곳의 목회자는 2023년부터 4년간 각각 월 70만원의 최저 생계비를 받게 된다.
치열한 갑론을박이 벌어졌으나 안건은 통과되지 못했다. 한데 당시 현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발언은 모든 논의가 일단락된 뒤에야 등장했다. 주인공은 회의의 의장이자 이 연회 감독이던 김정석 목사로, 그는 “이것(기금 조성)은 내가 하자고 해서 시작된 것”이라고 말한 뒤 약 5분간 열변을 쏟아냈다.
“다들 어렵다는 거 안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나. 우리 연회가 국내 선교와 해외 선교에 쓰는 비용이 매년 수십억원에 달한다. 그렇게 많은 돈을 쓰면서 정작 우리 식구(미자립교회 목회자들)는 챙기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동역자를 섬길 수 없다면 누가 그들을 챙기겠는가. 이제 좀 나누고 살자. 그래야 교회가 산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있다.”
김 목사의 발언이 끝나자 엄청난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연회에서 펼쳐진 이 같은 광경은 지난해 한국교회를 취재하면서 마주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기도 했다. 결국 이 연회는 2개월이 흐른 지난해 6월 기금 조성을 최종 결의했다.
기금 조성을 통한 목회자 최저 생계비 지원 제도는 기본소득제와 비슷한 성격을 띤다. 재정 운용 주체가 정부가 아닌 교단이고 수혜자가 목회자로 한정된다는 점이 차이겠으나 두 제도의 취지는 비슷하다. 이런 제도를 도입하려는 논의가 진행된 배경엔 한국교회 목회자들이 처한 팍팍한 현실이 있다. 가령 감리교단 소장파 목회자 모임인 새물결이 2년 전 내놓은 자료를 보면 기감 소속 교회의 48%가 미자립교회다. 이들 교회 교역자의 월평균 급여는 80만원에도 미치지 못한다. 다른 교단의 사정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목회자 중엔 이중직 목회의 길을 택하는 이가 수두룩하다. 짐작건대 이들을 짓누르는 만년설 같은 생계의 짐은 그들이 걸머진 소명의 무게보다 무거울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 전체가 달려들어 작은 교회 목회자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어쩌면 이것은 공교회성 회복의 첫 단추를 끼우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반대의 목소리도 예상 가능하다. 기본소득 도입을 둘러싸고 그간 교회 울타리 바깥에서 벌어진 논란들을 떠올려 보자. 이 시스템의 도입을 가로막는 가장 높은 장벽은 윤리적 반감이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는 말씀처럼 기본소득은 게으름이라는 악덕을 부추기는 제도처럼 여겨지곤 한다. 목회자 기본소득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많은 이는 목회자에게 기본소득을 주면 작은 교회를 섬기는 이들이 품어야 할 교회 부흥의 열정이 식을 수도 있다고, 누군가는 목회를 하지 않고 교단에서 주는 돈만 받아먹는 윤리적 일탈을 저지를 거라고 넘겨짚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교회 목회자를 섬기는 ‘시스템’이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미자립교회 문제는 해결이 난망할 수밖에 없다. 한국교회는 언제까지 그들을 시혜와 연민의 대상으로만 삼을 것인가.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이라는 책엔 기본소득의 가치를 설명하면서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출애굽기 16장을 깊이 들여다보라. 노예 신세에서 탈출해 여행길에 오른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늘에서 만나를 받아먹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나태해지지 않았고 만나 덕택에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박지훈 종교부 차장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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