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화가 변신한 유동근…“예술가 광기에 눈물도”

홍지유 2023. 1. 1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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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근이 연극 ‘레드’에서 실존 인물인 추상 화가 ‘마크 로스코’ 역을 맡았다. [사진 신시컴퍼니 ]

배우 유동근이 30년 만에 연극에 도전했다. 컴백 작품에서 그가 맡은 역은 20세기 미국 추상주의를 이끈 화가 마크 로스코. 46년 차 배우가 “평생을 살아도 연극배우라는 타이틀은 달지 못할 것”이라고 겸손한 고백을 하게 만든 이 작품은 ‘레드’다. 호텔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를 그리던 로스코가 계약을 돌연 취소한 사건을 토대로 한 연극이다. 지난해 말 개막한 공연은 다음 달 19일까지 이어진다.

미국 극작가 존 로건이 쓴 ‘레드’는 어마어마한 대사량을 자랑한다. A4 용지 62장 분량의 대본으로 빈틈없이 채워진 100분짜리 연극을 주연 배우 두 명이 연기한다. 실존 인물인 로스코와 가상 인물인 로스코의 조수 켄이 탁구를 하듯 빠르게 대사를 주고받는다. 미술계 거목인 로스코는 기성세대를, 켄은 신진 세력을 대표한다.

로스코가 추상주의를, 켄이 팝아트를 내세우며 서로 격렬히 치고받는 대목이 연극의 백미다. 유씨는 “매번 같은 대사를 읊지만, 이번에는 어떻게 다르게 표현할지 고민한다”며 “그런 의외성이 연극의 매력”이라고 했다.

대사의 밀도도 상당하다. 미술사 흐름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화가 마티스, 피카소, 폴록이 나오고, 로스코의 인생관을 드러내는 장치로는 철학자 니체, 융, 프로이트가 등장한다. 빠르고 긴 문어체 대사의 연극은 베테랑 배우에게도 어려운 숙제다. 그가 다른 배우들보다 3주 앞서 “집에서든 차 안에서든 대본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습”한 이유다. TV 드라마 발성을 연극 톤으로 바꾸려고 발성 코치까지 붙였다.

유씨가 느낀 로스코는 “외롭고, 까탈스럽고, 치열하면서도 광적인 예술성을 갖춘 인물”이다. 로스코는 1958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고급 레스토랑에 걸릴 벽화를 그리는 조건으로 3만5000달러(약 4300만원)짜리 계약을 한다. 하지만 이내 계약을 취소하고 계약금을 모두 돌려준다. “그런 곳에서 그런 음식을 먹는 사람은 절대로 내 그림을 쳐다보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유씨는 “그런 예술가 정신을 예우할 수밖에 없다”며 “요즘은 (그림을 거둬가겠다는) 그 대목에서 아이처럼 울어보기도 한다”고 말했다.

‘레드’는 2010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한 뒤, 그해 토니상 최우수 작품상과 조명상, 음향상 등 6개 부문을 휩쓸며 최다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국내에서는 2011년 초연 이후 다섯 시즌 동안 객석 평균 점유율 95%를 기록했다.

극은 미술사의 세대교체를 다룬다. 피카소의 큐비즘을 로스코의 추상주의가 밀어내고, 로스코의 추상주의를 앤디 워홀의 팝아트가 밀어내다는 내용이다. 표면적으로 미술사를 내세우지만, 이면에서 얘기하는 신구의 대립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고 어디에나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내용이기도 하다.

‘레드’를 계기로 연극 무대에서 배우 유동근을 더 자주 볼 수 있을까. 그는 “배우는 연기하던 배역에서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필요하다. 로스코를 ‘소각’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그만큼 자신이 로스코를 연기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다는 얘기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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