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위대한 알코올중독자’<73>] 구속
<작가 주> 우리나라는 음주공화국이라 할 만큼 음주에 관대한 사회입니다. 반면, 술로 인한 폐해는 매우 심각합니다. 주취자의 강력범죄가 증가하고 알코올중독자가 양산됩니다.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가 풍비박산나기도 합니다. 술 때문에 고통 받는 개인과 가정, 나아가 사회의 치유를 위해 국가의 음주·금주정책이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술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습니다. 항상 경계해야 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들려드립니다.
제73화 구속
방선희는 석방행사가 모두 끝나고 나서야 이철백을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연인처럼 손을 꼭 잡은 채 인사동 길을 걷다가 아직 문을 닫지 않은 자그마한 식당 하나를 발견했다. 막 장사를 마치려던 초로의 여주인은 인심 좋게도 두 사람을 응대해 주었다. 방선희는 자리에 앉으며 며칠 사이에 수척해진 이철백을 애잔하게 바라보았고 이철백은 자신을 기다려준 방선희에게 진정으로 감동과 고마움을 느꼈다.
“고마워.”
이철백이 그윽한 눈빛으로 방선희를 응시했다. 혼인신고를 한 건 아니지만 이제야 제대로 자신의 아내가 된 것만 같았다.
간단한 식사와 반주로 요기를 하고 이철백과 방선희는 근처 모텔로 들어갔다. 잠깐 눈을 붙이고 지하철이 움직이는 시간이 되면 중앙지검 앞으로 가서 김석규의 석방을 기다려야 했다. 아침이 되면 김석규가 긴급체포 당한 지 48시간이 되고 구속영장이 발부되지 않는 한 검찰은 김석규의 신병을 구금해 둘 수 없었다. 이철백은 얼른 샤워를 마치고 침대 위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불 속이 마치 고치처럼 느껴지며 스스로 애벌레가 된 듯 마냥 편안하기 그지없었다.
꽤 깊은 잠에 빠졌다 싶었는데 방선희가 샤워하고 나서 침대 위로 올라오는 바람에 이철백은 문득 잠을 깨게 되었다. 방선희는 곤히 잠들었던 이철백을 깨게 한 것이 미안하고 안쓰러웠는지 얼른 자라며 다독거려 주었다. 그 바람에 방선희의 풍만한 가슴이 이철백의 눈앞에 드리워졌다. 불현듯 짜릿한 전율이 일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고 보니 김석규의 농성이 시작된 이후로 오래간만에 방선희와 한 침대에 누워보는 것이었다.
이철백의 손길이 닿자 방선희의 몸은 빠르게 젖어들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마음이 컸던 만큼 그리 길게 전희를 끌지 않아도 관계를 갖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이철백과 방선희는 서로를 껴안은 채 몸서리치도록 뜨거운 열락의 몸짓으로 점점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절정에 이르자 두 사람은 온몸의 기운을 서로에게 쏟아 붓고는 곧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철백과 방선희가 중앙지검 청사 앞에 도착하자 이미 야당 당직자 몇이 서성이고 있었다. 청사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쪽에 방호원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었다. 이철백은 안면이 있는 당직자와 인사를 나누고 방선희와 함께 계단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안 내려가도 돼?”
이철백이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방선희는 한동안 이철백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생긋 웃으며 반문했다.
“왜, 내가 내려갔으면 해?”
“아니, 그게 아니라….”
이철백이 말꼬리을 흐렸다. 사실 방선희가 이렇게 곁에 있어주는 것만도 이철백에겐 큰 힘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잡아두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사실상의 부부라 할지라도 방선희는 나름대로 자신의 삶이 있기 때문이었다. 블랙&화이트도 방선희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추석 연휴에 가게 문 안 연다고 생각하면 돼. 그 동안에 석규 씨도 풀려나겠지.”
“고맙다. 항상 네게 도움만 받고 산다.”
“알면 다행이다!”
방선희가 목청 굵게 남자처럼 대꾸하자 이철백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갑자기 현관문 쪽에서 시끄러운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이철백과 방선희는 뭔가 심상찮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하고 힘껏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뭐라고?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고!”
현관문 앞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한 당직자를 둘러싸고 서너 명이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
전화를 받고 있는 당직자 주위에서 다른 당직자 하나가 상기된 얼굴로 누구에게 퍼붓는지 모를 욕설을 해댔다. 이철백은 전화 받는 당직자에게 바짝 붙어 한 마디라도 더 듣기 위해 귀를 쫑긋 기울였다.
“네, 알았습니다.”
전화를 끊은 당직자가 침을 꿀꺽 삼키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철백은 궁금증을 누르며 당직자의 바짝 마른 입술만 응시했다.
“김석규 동지가 구속되었답니다.”
“구속 사유가 뭔데요? 유언비어 유폽니까?”
“유언비어 유포가 아니라 국가보안법 위반이랍니다.”
“국가보안법요? 아니 무슨 국보법씩이나!”
“그러게 말입니다.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를 불신하게 했으니 이게 이적행위가 아니냐며 구속했다는데 영장을 청구한 놈이나 발부한 놈이나 그놈이 그놈이에요.”
전화를 끊은 당직자가 어이없다는 듯 쓴 웃음을 흘렸다.
“그럼 이대로 보고만 있을 거요. 어떻게든 액션을 취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이철백이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애원하듯 당직자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전화를 끊은 당직자가 곧 금주투쟁본부장과 소속 국회의원들이 올 거라며 잠시 기다리자고 했다. 사람들은 분노의 시선을 현관 안으로 쏘아대며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방호원들이 무표정한 얼굴로 먼 산 보듯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보에 의하면 말입니다.”
일단의 사람들과 함께 온 금주성 의원이 한숨을 섞어가며 말을 꺼내놓았다. 사람들이 금주성 의원의 그늘진 얼굴을 응시하며 다음 발언을 기다렸다.
“국보법으로만 엮는 게 아니라 내란선동까지 검토하는 모양입니다.”
“예? 무슨 그런 개 같은?”
“지금이 군부독재도 아니고, 뭐야 이거!”
“그냥 이 자리에서 같이 구속되고 맙시다!”
사람들이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이철백과 방선희의 심정 역시 그들과 결코 다르지 않았다. 금주운동이라는 선량한 캠페인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국보법에다 내란선동죄까지 뒤집어씌우려 하다니 이 나라가 제대로 된 국가인가 싶었다. 이철백은 비장한 표정으로 금주성 의원에게 건의했다.
“의원님,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집회를 하든 시위를 하든 강력하게 항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래야죠. 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추석연휴와 닿아있어 투쟁동력이 올라오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들 귀성해서 여론을 일으키는데 총력을 다 합시다. 그리고 추석이 지나고 나면 대대적인 대정부 집회를 개최하도록 합시다.”
“그럼 지금은 그냥 아무 것도 하지 말자는 거잖아요! 하다못해 이놈의 검찰청사 유리창이라도 한 장 박살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이철백이 눈에 핏발을 세우며 울부짖듯 항의했다.
박태갑 소설가great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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