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격에 맞대응 자제하면서... 명림답부가 주는 교훈

김종성 2023. 1. 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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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tvN <환혼: 빛과 그림자>

[김종성 기자]

 tvN <환혼: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 tvN
 
이번 주에 종방된 tvN 사극 <환혼: 빛과 그림자>에는 물리학과 연계된 술법으로 압도적 위력을 발휘하는 무사들이 등장했다. 낙수(고윤정 분)와 장욱(이재욱 분) 같은 무사들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술법까지는 부리지 않았지만 압도적 위력을 발휘한 고구려인들이 있었다. 고구려 멸망 직전의 연개소문도 그런 인물이었고, 고구려 성장기 때의 명림답부도 그런 유형에 속했다.

명림답부가 활약한 서기 2세기 후반은 유방의 한나라를 계승한 후한(25~220)이 점점 기울 때였다. 한민족을 비롯한 동아시아 민족들이 후한의 권위를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거기에 도전해 동아시아 질서가 격동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대에 명림답부라는 압도적 이미지의 고구려인이 역사무대에 올라섰다.

명림답부는 서기 165년에 차대왕 정권을 무너트리고 실권을 차지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차대왕 편은 "연나조의인 명림답부가 백성들이 견딜 수 없어 한다는 이유로 왕을 시해했다"라고 전한다. 이 쿠데타의 결과로 명림답부가 실권자가 되는 신대왕 정권이 수립됐다.

군주 능가하는 위상, 막강한 권한 신중하게 쓴 명림답부

명림답부는 검사(劍士) 출신이었다. 직업적인 무사에서 출발했던 것이다. 고구려 5부 중 하나인 연나부에 속한 조의선인 출신이었다. 고구려판 화랑이었던 셈이다.

역사학자 신채호는 중국에서 편찬된 <주서> <고려도경>을 근거로 조의선인에 관해 설명했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는 "<주서>에서는 조의나 선인을 예속이나 선인이라 불렀다"라며 "선인(先人)이나 선인(仙人)은 국어의 '선인'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라고 한 뒤 "선인은 종교 무사단의 단장으로 신라의 국선 같은 인물"이라고 해설했다.

명림답부는 동료 검사들의 도움으로 집권에 성공했다. 신채호가 승군으로 부른 종교 무사단 단원들이 결정적 원동력이 됐던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승군의 내력을 모르면 고구려가 당나라 30만 대군을 물리친 원동력뿐만 아니라 명림답부가 이끈 혁명군의 중심이나 강감찬이 거란을 격파한 요인을 알 수 없게 된다"라고 지적했다.

무사에서 출발한 그는 쿠데타 뒤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장악했다. 고구려본기 신대왕 편은 쿠데타 이듬해인 166년에 그가 국상(國相)이 되어 "내외의 병마"를 관장하고 동맹 민족들을 관할하게 됐다고 알려준다.

명림답부가 활동한 시대는 물론이고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시대에도 '내외'라는 표현은 군주를 기준으로 사용될 때가 많았다. 임금을 기준으로 도성은 내(內), 그 밖은 외(外)로 인식될 때가 많았다.

명림답부가 내외의 군사를 관장했다는 것은 국경 경비뿐아니라 수도 경비까지도 책임졌음을 의미한다. 국무총리 급의 인물이 전국의 병마를 관할하고 주변의 동맹 민족들까지 관리하게 됐으니, 그의 위상은 군주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지만, 그는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특히 중국과의 대결에서는 신중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진정 압도적이었던 그의 태도
 
 tvN <환혼: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 tvN
 
그렇다고 그가 중국과의 대결을 기피한 것은 물론 아니다. 2022년 8월에 <한국사학보> 제88호에 수록된 신진 역사학자 김세진의 논문 '고구려 신대왕대(代)의 대(對)후한 전쟁과 예맥'은 채옹(132~192)의 <황월명> 등을 근거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후한의 공격을 방어한 기록만 전하는 반면, 채옹의 <황월명>과 <후한서> 교현전에는 신대왕이 후한을 선제공격한 사실을 전한다"라고 정리한다.

<황월명>에 나오는 신대왕 시대의 선제공격은 후한 황제인 환제(재위 146~167년)의 재위 기간 내에 있었다. 165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신대왕을 옹립하고 179년에 사망한 명림답부의 집권 기간 내에 있었던 일이다.

명림답부는 이처럼 최강국인 후한을 상대로 선제공격까지 했지만, 대결적 자세를 섣불리 드러내지는 않았다. 172년에 후한이 대규모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도 그런 태도가 잘 드러났다.

당시 고구려 조정에서는 자신만만한 태도가 우세를 점했다. 명림답부 열전에 따르면, 조정의 중론은 '중국이 우리를 가볍게 보고 있으니 우리가 대응하지 않으면 우리를 무시해서 자주 침략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관문만 잘 지키면 무사하다'라는 것이었다. 주요 관문을 거점으로 적극적 방어전에 나서자는 게 중론이었던 것이다.

명림답부 역시 중국군을 막아야 한다는 데에는 이의가 없었다. 다만, 중국 같은 강대국을 섣불리 상대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는 "그렇지 않다"라는 말로 위와 같은 조정 중론을 억누른 뒤 신중론을 역설했다.

그는 '땅도 크고 백성도 많은 후한이 강병을 끌고 와서 싸울 태세를 보이고 있으니 그 기세를 당해내기는 힘들다'라고 진단했다. 강한 기운을 상대로 정면으로 달려들면 낭패를 볼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그는 "병력이 많은 쪽은 마땅히 싸우고 병력이 적은 쪽은 마땅히 지키는 것이 병법의 이치"라고 강조했다. 먼저 적극적으로 싸움을 거는 것은 병력이 많을 때나 가능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의 방책은 중국군의 약점을 이용해 수비에 중점을 두면서 지구전을 펴는 것이었다. 중국군이 장거리를 이동하는 바람에 보급선이 길어졌으므로 시간을 끌어 중국군을 굶주리게 만든 뒤에 대규모 공격을 개시한다는 게 그의 작전이었다.

이런 방책에 따라 그는 중국군의 공격에 대한 맞대응을 자제하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 결국 중국군은 굶주림에 지쳐 철군을 선택했고, 이들이 등을 돌린 틈을 이용해 그는 기병대를 내보내 대승을 거뒀다. 명림답부 열전은 "한나라 군대는 대패했으며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라고 알려준다. 신중한 대처법이 결국 대승으로 연결됐던 것이다.

그런 성과들을 토대로 명림답부는 압도적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 이미지는 적을 무시하는 담대한 발언으로 생긴 게 아니었다. 신중한 행동으로 확실한 승리를 거뒀기 때문에 얻은 것이었다. 그의 신중한 태도는 <환혼>의 술법을 능가하는, 진정으로 압도적인 위력이었다.

1990년대 초반에 현저히 약해진 냉전구도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이래로 서서히 복구되면서,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모험적인 발언을 자주 하는 국가 지도자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상대방 국가를 폄하하며 대결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지도자들을 언론보도에서 자주 접할 수 있다.

신냉전으로 불리는 이 정세를 살아남게 될 국가는 상대를 무시하는 담대한 발언으로 위기를 부추기는 지도자를 둔 나라가 아니라, 명림답부처럼 싸울 때는 싸우더라도 최대한 신중을 기하는 지도를 둔 나라이리라는 점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tvN <환혼: 빛과 그림자>의 한 장면.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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