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돌발 행보에 재계 반발…‘주주권 행사 논쟁’으로 비화된 구현모 연임
국내 대표 통신사인 KT 이사회가 구현모 현 대표를 차기 대표 후보로 최종 결정했다. 새해 3월 임기가 만료되는 구 대표의 연임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국민연금이 주주총회에서 반대할 뜻을 내비치면서 한 치 앞을 알 수 없게 됐다.
새해 3월 정기 주총서 확정
KT 대표이사후보심사위원회는 최근 구현모 대표를 차기 대표 후보로 주총에 추천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구 대표는 ‘연임 적격’ 결과를 받았지만, 자신을 둘러싼 논란을 피하기 위해 경선 절차를 밟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 추가로 연임 적격, 경쟁 심사가 진행됐다.
KT 지배구조위원회는 구 대표 등 사내 후보자 13인과 사외 인사 14명에 대해 대표이사 적격 여부를 검토했다. 이후 KT 대표이사후보심사위원회의 심사가 진행됐고 구 대표가 결국 차기 대표 후보에 올랐다.
구 대표가 연임 적격 판정을 받고 차기 대표 후보에 오르는 데 성공한 것은 경기 불황에도 탄탄한 실적을 거둔 덕분이다. KT는 2021년 연결 기준 매출 24조8980억원, 영업이익 1조6718억원을 기록했다. 구 대표 취임 전인 2019년(1조1595억원)과 비교하면 영업이익이 44% 증가했다. 2022년 들어서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3분기 연결 기준 매출 6조4772억원, 영업이익 4529억원을 기록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4.2%, 18.4% 증가했다.
덕분에 KT 주가도 날개를 달았다. 구 대표 취임 당시와 비교해 지난해 11월 말 기준 KT 주가는 90%가량 상승했다. 시가총액도 2019년 당시 7조원에서 최근 10조원 안팎으로 늘었다. 김홍식 하나증권 애널리스트는 “KT는 5G 보급률, 이동통신 가입자 추세를 감안할 때 새해에도 우수한 실적을 낼 가능성이 높다.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10% 늘고, 순이익 증가율은 더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하지만 구 대표가 잡음 없이 KT 차기 대표에 오를지는 미지수다. 심사 결과가 발표되자마자 국민연금이 곧장 제동을 걸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KT 지분 10.35%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서원주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CIO)은 보도자료를 통해 “KT의 CEO 후보 결정이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에 따라 이뤄져야 한다는 경선의 기본 원칙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새해 3월로 예정된 KT 정기 주총에서 구 대표 연임에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예고한 셈이다.
국민연금의 견제를 두고 주주의 당연한 권리 행사인지, 아니면 과도한 경영 개입인지 시각이 엇갈린다.
국민연금 입장에서는 KT 사외이사들이 구 대표 영향력 아래 주주 이익을 대변하는 독립적 역할은커녕 ‘거수기’ 역할만 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는 후문이다. 일례로 지난해 2월 KT 이사회에서는 KT 사외이사들이 박종욱 KT 안전보건총괄 대표를 사내이사로 재선임해달라는 회사 요청에 수긍해 반대표를 던지지 않았다. 국민연금은 당시 박 후보자가 국회의원 쪼개기 후원 혐의로 사법 처리를 받은 점을 거론하며 “기업가치 훼손과 주주 권익 침해 이력이 있다”고 반대했다. 사내이사 후보자로서 흠결이 드러났음에도 이를 문제 삼는 사외이사가 없었던 점에 실망했다는 후문이다. 당시 KT는 “벌금형을 받은 박 후보자가 결격 사유가 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고 항변한다. KT 사외이사들은 2021년 한 해 총 13차례 열린 이사회에서 단 한 차례도 반대 의견을 내지 않았다. 금융권 관계자는 “국민연금으로서는 KT 사외이사들이 견제 기능을 상실하고 주요 안건에 찬성표만 던졌다고 판단해 이번 구현모 대표 연임 과정도 신뢰를 하지 못한 듯하다”고 귀띔했다.
한편에서는 국민연금의 행동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잖다. 지난해에만 50조원 넘는 손실을 기록했고 연금 고갈 시기가 앞당겨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상황에서 수익률은 뒷전인 채 기업 인사 개입에만 치중하는 게 상식을 벗어났다는 주장이다. 구현모 대표 재임 기간 동안 KT 주가가 오르면서 최대주주 국민연금도 적잖은 이익을 누렸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그동안 KT, 포스코처럼 여러 기관이 지분을 가진 소유분산기업을 놓고 지배구조, 연임 절차에 대한 우려를 표시해왔다. 김태현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소유분산기업에 대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 책임 가이드라인)를 강화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를 두고 연금사회주의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크다. 연금사회주의란 국가가 국민연금 등 연기금을 동원해 기업들을 장악한 후 민간 기업 경영을 공기업처럼 좌우하는 것을 빗댄 말이다.
수탁자 위원회 등 의결 절차 없어
절차적 정당성조차 확보하지 못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서원주 CIO는 신임 본부장을 맡자마자 취임 일성으로 KT 후보 결정에 반대 입장을 내비쳤다. 재계에서는 기업 임원 선임, 해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주주권 행사의 일환인 만큼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 등을 통한 정식 의결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내부 의견 수렴 절차도 거치지 않은 국민연금의 돌발 행보에 KT뿐 아니라 다른 기업들도 긴장할 수밖에 없다. 국내 주식 시장에서만 120조원을 굴리는 막강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기업 경영을 좌지우지하려는 것 아니냐”고 꼬집었다. 이 때문에 시장에서는 보편타당한 국민연금 의결권 기준부터 정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쏟아진다.
그럼에도 통신업계에서는 구 대표의 ‘연임 대세론’이 흔들릴 가능성은 낮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행사하더라도 KT와 현대차그룹 간 지분 맞교환으로 우호 세력이 늘어 지분 구도가 구 대표에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KT 주주는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지분율 10.35%)을 비롯해 현대차그룹(7.79%), 신한금융그룹(5.58%) 등으로 구성돼 있다. 재계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정부 눈치를 보는 듯하지만 구 대표가 이룬 성과가 뚜렷한 만큼 주총에서 표 대결을 벌이더라도 결국에는 연임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지 않겠나”라고 귀띔했다.
그렇다고 마냥 안심할 때는 아니다. 구 대표를 둘러싼 악재도 적잖기 때문이다.
일단 사법 리스크를 무시할 수 없다. 구 대표는 황창규 전 대표 시절 불거진 ‘국회의원 후원금 쪼개기 지원 사건’에서 명의를 빌려준 혐의로 벌금 1500만원의 약식 명령을 받았지만 이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KT 정관을 보면 대표이사 결격 사유는 ‘금고 이상의 형을 받았을 경우’다. 구 대표는 벌금 1500만원의 약식 명령을 받은 만큼 결격 사유가 적용되지 않는다.
구 대표가 2020년 KT 대표 취임 이후 줄곧 강조해왔던 ‘디지코 사업’을 두고서도 말들이 많다. 탈통신을 화두로 내세우면서 뚜렷한 성과를 냈지만 정작 본업인 통신 업무에 소홀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2021년 10월 전국에서 1시간 넘게 이어진 유무선 네트워크 장애로 여론 불만이 극에 달했다. 새해 들어서도 1월 2일 부산, 울산, 경남 일부 지역에서 유선 인터넷과 인터넷 기반 음성 전화(VoIP) 서비스 접속 지연이 빚어졌다. 구현모 대표가 숱한 논란을 딛고 연임에 성공할 수 있을지 재계 관심이 뜨겁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92호 (2022.01.11~2023.01.1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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