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대 국회의원, 곧 일어난 6.25전쟁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김삼웅 기자]
제헌의원 임기가 2년이어서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서민호는 지역주민들의 요청으로 고흥을구에서 입후보하여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무소속이었다. 3.1혁명에 어린 학생으로 참여한 이래 그동안 집념어린 교육사업과 한글학회사건 투옥 등이 지역주민들의 '평가'를 받은 것이다.
여당이 참패하고 전체 210석 중 무소속 당선자가 126명에 이르렀다. 국민은 이승만 정권 2년을 불신한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 척결에 나선 반민특위를 해체시키고, 독립운동의 상징 김구를 암살했으며, 부정부패가 만연하는 등 신생조국의 앞길을 어둡게 만들었다. 서민호가 이제껏 꿈꾸었던 부강한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데 일역을 하고자 의정활동을 단단히 준비하고 있을 즈음 6.25 전쟁이 발발했다.
1950년 5월 30일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는 5·10선거에 불참했던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출마하여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보수·진보의 보혁대결 구도를 이루며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바람을 일으키자, 이승만 정권은 그들을 투옥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탄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는 조소앙이 조병옥을 누르고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고, 무소속이 과반수를 넘는 126석을 차지했다. 한민당을 계승한 민국당은 참패했다. 제2대 국회는 문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쟁이 발발해 중도파 정치인들이 납북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쟁 중 피해대중의 입장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역할을 많이 했다. (주석 1)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40분을 기해 전면 남침을 자행했다. 소련제 T-34형 탱크 240여 대, 야크 전투기와 IL폭격기 200여 대, 각종 중야포와 중박격포로 무장하고 있었다.
38선은 쉽게 무너지고 북한군은 밀물듯이 남하하여 26일 낮 12시경에는 야크기 2대가 서울 상공에 날아와 김포공항을 폭격했다. 이승만 정부의 방비나 대처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이승만은 25일 오전 10시 30분경에야 남침 보고를 받았다. 이날 이승만은 9시 30분부터 경회루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이승만이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하고, 국회의원들도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서민호는 조병옥과 대구에 머물다 부산에서 피난온 국회의원들과 합류하였다. 국회 내무분과 위원장이었다.
이 대통령의 정실에 흐른 인사처리는 드디어 많은 부작용을 낳게 되었다.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친일세력이 다시 그 악랄한 권모술수를 써서 이대통령을 싸고 돌았다. 부정과 부패는 국가가 위기를 당했을 때 더욱 더 빠른 속도로 커가기 마련인 것이다. 국민방위군사건은 6.25사변이 발발한 2년 후 제2국민병을 죽음과 기아의 무참한 희생물로 만들었던 너무나도 유명한 사건이다. (주석 2)
전쟁 중에 이승만 대통령의 행태는 국난을 극복하고 국민을 보호하여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자세가 아니었다. 1951년 1월 국민방위군사건이 벌어졌다. 정부는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여 제2국민병에게 해당하는 만 17~40세의 장정들을 국민방위군에 편입시켰다. 국군의 후퇴가 시작되어 방위군을 후방으로 집단 이송하게 되자, 방위군 간부들은 이 기회를 틈타 막대한 돈과 물자를 빼돌려 사복을 채웠다. 그 결과 보급부족으로 천 수백 명의 사망자와 환자가 발생했다. 이들이 부정처분한 돈과 물자는 당시 화폐로 무료 24억 원, 양곡 5만 2천 섬에 달했다.
국회는 진상조사에 나서는 한편, 4월 30일 방위군 해산을 결의함에 따라 5월 12일 방위군은 해산되고, 사건을 일으킨 김윤환 등 4명은 처형되었다.
국회조사단이 구성되어 국민방위군사건의 진상조사에 나서자 이승만은 국방장관 신성모를 해임하고 이기붕을 임명하면서 수습에 나섰으나 이승만과 정부의 행태, 군부의 부패 문제는 쉽게 시정되지 않았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거창사건을 비롯하여 전국(남한) 도처에서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이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해 학살되었다. 민간인 학살은 국군과 경찰, 특무대, 서북청년단 등 우익세력에 의해 '빨갱이', '통비분자'로 몰려 자행되고, 미군에 의해 집단학살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1950년 6~8월에 자행된 국민보도연맹(보도연맹) 학살사건은 수법이나 희생자 수에 있어서 천인공노할 만행이었다. 보도연맹은 1949년 반공검사 오제도의 제안으로 이른바 좌익운동 전향자들이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전과를 묻지 않는다고 내세우며 조직하였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군·경·서북청년단 등이 이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집단학살한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예비검속을 당하거나 자발적으로 경찰서에 출두할 때까지 생업에 충실한 민간인이 대부분이었다.
군·경과 우익 단체들은 이들이 북한군에 동조할지 모른다는 이유에서 예비검속하거나 강제로 검거하여 집단학살극을 자행하였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남한 전역에서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학살이 감행되었다. 육지에서는 산속이나 계곡, 강가 등 인적이 드문 곳에서, 해안지방에서는 배에 실어 돌을 매달아 수장한 경우도 많았다. (주석 3)
6.25한국전쟁 기간에 남한의 국민들은 북한인민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도 많았으나 군·경과 우익단체·미군에 의해 희생된 경우도 이에 못지않았다. 일차적인 책임은 현지 관련자들이지만, 정치적 책임은 오롯이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었다.
정부는 북한군에 밀려 대전에서 대구로 이전했다가 1950년 8월 18일 부산으로 옮겼다. 1592년 4월 13일 일본군의 침략으로 선조가 국토의 최북단 의주로 피난한 이래 358년 만에 이번에는 이승만이 최남단 부산까지 피난한 것이다. 임진전쟁 때는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고, 6.25한국전쟁 때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다. 선조는 한때 명나라로 망명을 준비하고, 이승만은 수도를 제주도나 일본으로 옮길 계획을 세웠다.
주석
1> 서중석, <대한민국선거이야기>, 55쪽, 역사비평사, 2008.
2> <이 정권과의 투쟁(24)>
3> 김삼웅, <해방후 양민학살사>,163쪽, 가람기획,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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