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웨스트우드의 가장 반항적인 순간들_요주의여성 #78
박지우 2023. 1. 10. 14:53
디자이너인 동시에 혁명가, 사회운동가였던 그의 기념비적인 순간들을 돌아봤습니다.
지난 12월 29일, 새해를 며칠 앞두고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부고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펑크룩의 창시자이자 긴 시간 세계 패션계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해온 그는 단지 옷만 짓는 디자이너가 아니었습니다. 질서에 순응하기보다 영원한 악동으로 살고자 했던 그는 사회정의와 인권, 환경 문제 등 여러 가지 이슈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때로는 도발적이고 때로는 격렬하게 자신의 의견을 펼쳐 보였습니다. 언제나 젊고 거칠고 섹시했던, 남다른 기상과 배포를 지닌 진정한 반항아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기념비적인 순간을 모아봤습니다.
「 #펑크의 여왕 」
1970년대 런던에서 탄생한 펑크 문화의 중심에는 바로 비비안 웨스트우드와 파트너 말콤 맥라렌이 있습니다. 1971년 첼시 킹스로드에 ‘Let it Rock’란 이름의 작은 부티크를 연 두 사람은 1974년 ‘SEX’로 가게명을 바꾸고 반항심이 풍기는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옷들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섹스 숍은 런던 아웃사이더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맥라렌이 매니저로 나선 밴드 섹스 피스톨즈가 이들의 옷을 입으면서 두 사람이 창조한 스타일은 음악과 함께 전 세계에 퍼졌습니다. 펑크 시대를 열었던 저항 정신은 이후에도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삶과 패션에 중요한 DNA로 작용했습니다.
「 #파격과 도발 」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쇼는 지루한 적이 없습니다. 1981년 ‘해적’ 컬렉션으로 런던 패션 위크에 데뷔한 그는 맥라렌과 결별한 뒤 독자적인 패션 세계를 구축하며 잊지 못할 장면들을 연출했습니다. 1990년 ‘포트레이트’ 쇼에서는 여성 억압의 상징인 코르셋을 겉옷으로 재해석해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으며, 1993년 ‘카페 소사이어티’ 쇼에서는 케이트 모스가 ‘톱리스’에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런웨이를 거닐었습니다. 1994년 파리 패션 위크에서는 카를라 브루니가 인조 모피 코트에 G-스트링 비키니를 입고 등장했지요.
「 #OBE 세레모니 」
1992년 영국 패션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제국훈장(OBE)을 받게 된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화제의 기념사진을 남겼습니다. 기자들 앞에서 치마를 들고 빙그르르 돌며 포즈를 취하다가 그만 ‘속옷을 입지 않은’ 속사정이 드러나고 만 것. 워낙 파격을 즐기는 명사이다보니 의도된 퍼포먼스라는 소문도 있었으나, 나중에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나는 단지 옷을 뽐내고 싶었을 뿐이에요. 몇몇 사진가들이 무릎을 꿇고 있다는 걸 생각 못 했던 거죠.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글래머러스한’ 결과물이 나왔지요.”
「 #정의의 수호자 」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늘 정의와 자유의 편에 섰으며 패션은 그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플랫폼이기도 했습니다. “I am not a terrorist. Please don’t arrest me.” 빨간 하트 위에 어린아이가 쓴 글씨 같은 문장을 우리말로 옮기자면 “나는 테러리스트가 아니에요. 날 체포하지 마세요”. 2005년 선보인 이 티셔츠는 영국 인권단체 ‘리버티’와 협업한 것으로, 당시 영국 정부가 발의한 테러 방지법에 반대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테러 용의자를 기소 없이 최대 3개월간 구금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의 내용이 무고한 시민의 자유를 빼앗을 위험이 있다고 본 것이죠.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본인이 디자인한 티셔츠를 직접 입고 카메라 앞에 서서 “법보다 정의가 중요하다”라고 밝혔습니다.
「 #기후 혁명 」
비비안 웨스트우드가 생전에 가장 열정적으로 활동했던 이슈가 바로 환경 문제입니다. “패션보다 지구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라고 말한 그는 패스트 패션을 지양하고 좋은 옷을 오래 입으면 탄소 배출량을 줄일 수 있다며 “적게 사고 잘 고르자”는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환경 단체들을 후원하고 아마존 열대우림을 방문하기도 했던 그는 2012년 컬렉션 피날레에서 기후 혁명(Climate Revolution)을 선언하고 관련 캠페인을 지속했습니다. 2015년 런던 패션 위크에서는 레드 라벨 쇼를 시작하기 전 모델 군단을 이끌고 색색의 왕관과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는 플래시 몹을 실행하기도 했지요. 지하 깊은 곳에 매장된 셰일가스를 추출하는 프래킹(수압파쇄) 공법이 환경을 파괴한다는 논란이 일자 이를 반대하는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당시 총리였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집 앞으로 탱크(!)를 몰고 가기까지!
「 #줄리안 어산지를 위하여 」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저널리스트이자 위키리스크 설립자인 줄리안 어산지의 열렬한 지지자였습니다. “줄리안 어산지는 영웅”이라 여긴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그가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부터 친분을 나눴으며 여러 자리에서 그의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패션쇼 피날레에 “I am Julian Assange’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등장하는가 하면, 2020년에는 줄리안 어산지의 미국 송환을 반대하며 대형 새장 안에 매달려 시위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줄리안 어산지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장례식 참석을 위해 특별 외출을 요청했다고 하는데, 그의 요청이 승인될지는 미지수라고 하네요.
이 세상에 그처럼 옷을 입고 그처럼 행동하는 할머니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좀더 자유로워졌을지도 모릅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술가로서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했으며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유의 전사(freedom fighter)”가 되라고 독려했습니다.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삶과 패션이 남긴 빛나는 레거시가 오래도록 기억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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