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베트남 항구도시에 찬사 보내는 이유
[김찬호 기자]
타이완 섬을 떠나 저는 베트남으로 들어왔습니다. 하노이는 6년 만의 방문이고, 베트남 전체로 따지면 5년 만의 방문입니다. 베트남과는 이상하게도 자주 인연이 닿는 모양입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베트남어도 기초적인 수준으로 더듬더듬 했었으니까요.
오랜만에 방문한 하노이의 밤은 더욱 밝아져 있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세계적인 사건이 하늘길을 가로막고 있는 동안에도, 이곳에서는 또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삶을 영위해 왔을 것입니다.
하노이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침, 곧바로 기차를 타고 하이퐁으로 향했습니다. 시가지 인근에 있는 롱비엔 역에서 기차를 타면 두 시간 반 정도를 달려 종점인 하이퐁에 도착합니다. 철도는 노선 폭이 1000mm 밖에 되지 않는 협궤에 구불구불 이어진 기찻길은 때로 시가지 한복판을 아슬아슬하게 통과합니다. 기차 한 대가 운행하면 맞은편에서는 운행할 수 없는 단선 철도입니다.
▲ 하노이-하이퐁 간 철도 |
ⓒ Widerstand |
'하이퐁'이라는 도시의 이름은 독특합니다. 지금은 베트남어가 모두 라틴 문자를 차용한 '쯔 꾸옥 응우(Chữ Quốc Ngữ)'라는 문자로 표기되지만,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처럼 베트남도 원래는 한자 문화권입니다. 당장 '쯔 꾸옥 응우'라는 말도 '자국어(字國語)'라는 한자를 베트남 발음으로 읽은 것뿐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비엣남'은 '월남(越南)'의 베트남식 발음이고, '호치민'의 한자 이름은 '호지명(胡志明)'이라고 씁니다. 지금은 베트남에서 한자 병기가 거의 드물어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하노이'라는 도시의 이름도 원래는 '하내(河內)'라는 한자어입니다. 그리고 제가 방문한 '하이퐁'은 한자로 '해방(海防)'이라고 씁니다.
▲ 하이퐁 거리 |
ⓒ Widerstand |
여기서 해군을 강화하자는 측을 '해방(海防)'론, 육군을 강화하자는 쪽을 '새방(塞防)'론이라고 부릅니다. 해방론의 선두주자가 우리가 알고 있는 이홍장이었고, 새방론의 선두주자가 좌종당이었습니다. 이것을 '해방-새방 논쟁'이라 부르고, 이를 배경으로 성장한 북양함대는 이홍장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되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해방'은 아주 중요합니다. 일본은 이른 시기부터 러시아의 남하를 마주하며 바다를 통한 서구 열강의 침입을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1792년부터 막부의 가장 높은 관료인 로주(老中)들 가운데 '해방괘(海防掛)'라는 직책을 만들어 바다를 방어하는 일을 전담하는 관료를 두었습니다.
임시직이었던 해방괘 로주는 1845년부터 상설화되었고, 로주 뿐 아니라 막부의 핵심 직책인 메츠케(目付) 등에도 해방괘 자리가 설치됩니다. 에도막부 후기 개혁정책을 추진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 등이 모두 이 해방괘 로주 출신입니다.
▲ 하이퐁을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레 쩐 장군 동상 |
ⓒ Widerstand |
하지만 근대 역사의 격랑과 함께 하이퐁도 요동치는 시절을 겪게 됩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곧 프랑스 본토는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당했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에는 일본군이 진주하기 시작했고, 1945년 전쟁 말엽에는 아예 프랑스를 쫓아내고 일본이 직접 베트남을 지배했습니다.
하지만 곧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북쪽으로는 중화민국군이, 남쪽으로는 영국군이 들어와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지만 둘 모두 베트남을 차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남 남부로 군대를 파견해 식민군을 재결성하기 시작했습니다.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공산주의 세력은 빠르게 독립선언을 하고 새로운 국가 수립에 나섰습니다.
북부에서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이 성립되어 선거를 치르고 헌법을 만들었고, 1946년에는 프랑스도 베트남 주둔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이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리 쉽게 이 땅을 내줄 생각은 없었죠.
▲ 베트남 독립전쟁 당시 저항군이 사용한 피스톨 |
ⓒ Widerstand |
베트남이라는 아시아 약소국과 프랑스라는 한때 세계적 제국 사이의 전쟁은 물론 프랑스의 우세로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베트남군은 게릴라전을 계속하면서 프랑스에 상당한 피로감을 안겼죠. 특히 중국 대륙에서 국공내전에 승리한 공산당이 베트남군을 지원하면서 전쟁은 혼전으로 흘러갔습니다. 프랑스는 베트남 뿐 아니라 다른 식민지에 대해서도 유사한 정책을 이어갔기 때문에, 베트남 독립 전쟁에만 집중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 하이퐁 |
ⓒ Widerstand |
'해방(海防)'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이퐁은 한때 프랑스를 통해 근대 문물을 수입하는 항구였고, 그 프랑스의 침략마저 가장 선봉에서 맞은 항구였습니다. 지금은 항구와 산업시설을 끼고 있는, 아름답게 조경된 공원에서 사람들이 산책을 하는 평화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 하이퐁 공원 |
ⓒ Widerstand |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조국이 다시 부와 자유를 한 계급에 종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저 피부색이 같고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그것에 둔감해진 것은 아닌지,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지금 세대 베트남 사람들의 몫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