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박정희 제2의 토지개혁, 남덕우가 막았다

주정완 2023. 1. 10.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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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양균 남기고 싶은 이야기] 진영을 넘어 미래를 그리다 〈15〉 70년대 부동산 대책과 토지개혁


변양균 전 기획예산처 장관
한국 경제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장면이 있다. 이승만 정부가 1950년에 단행한 농지개혁이다. 미국에서 진보적 판결로 유명한 연방대법관 윌리엄 더글러스가 그 무렵 한국을 방문했다. 이 대통령은 그에게 “농지개혁이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이 대통령의 말은 상당 부분 사실이다. 이때의 농지개혁은 60년대 이후 고도 경제성장의 기폭제가 됐다.

사실 70년대 후반 박정희 정부에서 또 한 번의 토지개혁을 시도한 적이 있다. 62년 화폐개혁 때처럼 전격적으로 단행하려고 했다. 40년 넘게 꼭꼭 묻혀 있던 이야기다. 나는 말단 사무관으로 비밀 작업반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때 토지개혁 방안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이 글을 준비하며 여러 자료를 살펴봤지만 당시 토지개혁 시도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사정을 아는 사람이 여럿 있을 텐데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 같다. 당시 20대 후반의 젊은 사무관이었던 나로선 세부 내용까지는 잘 모른다. 다만 이희일 청와대 경제1수석비서관의 주도로 토지개혁을 진지하게 검토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 이희일 수석, 비밀 작업반 구성해
화폐개혁 때처럼 전격 시행 검토
남덕우 부총리 “이러다 큰일 난다”
대통령 휴가지 급히 쫓아가 번복

사무관 시절 이희일 수석팀 차출

1979년 10월 26일 오전 충남 당진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이 방조제의 배수갑문을 여는 버튼을 누르고 있다. 왼쪽부터 이규홍 농업진흥공사 사장, 박 대통령, 이희일 농수산부 장관, 손수익 충남지사, 장영순 공화당 의원. 삽교호 준공식은 박 대통령의 생전 마지막 공식행사였다. [중앙포토]

박정희 정부 후반인 78년이다. 나는 군 복무를 마치고 경제기획원에 복귀해 김재익 경제기획국장 밑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를 포함한 경제기획원 공무원 몇 명이 청와대 지시로 이희일 수석팀에 차출됐다. 토지개혁 준비 작업을 위해서였다.

나는 토지개혁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을 했다. 전국의 토지 면적을 모두 합산한 뒤 세대별로 나눠보는 계산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한 세대당 평균 몇 평의 땅을 배분하는 게 공평한지 따져보는 일이었다.

컴퓨터는 당연히 없고 전자계산기도 초보적인 수준이었던 때였다. 사무실에 작은 계산기가 있었지만 복잡한 계산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됐다. 당시 직장에 다니던 여성들은 대개 주산을 잘 다뤘다. 내 아내도 그랬다. 어느 날 집으로 자료를 가져와 아내에게 계산을 부탁했다. 아내는 밤을 새우다시피 주산알을 놓아 가며 작업을 도왔다.

그 무렵 부동산 시장 과열이 심각한 사회 문제였다. 77년에는 연간 수출액이 처음으로 1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수출 호조와 중동 건설특수 등이 겹치면서 시중에 엄청난 돈이 풀렸다. 이 돈이 땅값과 집값을 빠른 속도로 밀어 올렸다. 정부로선 뭔가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때 이 수석이 구상한 토지개혁은 대략 이런 방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토지개혁을 발표하고 언제까지 신고를 받는다. 이때 일정한 기준을 초과하는 땅은 국가가 강제로 수용한다.’

토지거래 허가제 등 8·8조치 발표

남덕우

그런데 남덕우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급제동을 걸었다. 뒤늦게 얘기를 전해 듣고 “그러면 큰일 난다”며 펄쩍 뛰었다고 한다. 남 부총리는 토지개혁을 없던 일로 하되 강력한 부동산 종합대책을 마련했다. 78년 8월 8일에 발표한 ‘8·8 부동산 조치’다. 토지거래 신고제와 허가제 도입, 양도소득세 강화, 법인 비업무용 토지에 대한 재산세 중과 등을 담았다. 일본식 부동산 대책을 자세히 연구해서 한국식으로 바꿨다. 정부가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여러 대책을 모아서 내놓은 건 이때가 처음일 것이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경제개발의 길목에서』)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8월 휴가철이라 박 대통령은 경남 진해 저도의 별장에 머물고 있었다. 청와대 비서실에 시급한 사안이 있어 결재를 받아야 하니 연락을 취해 달라고 요청했다. 마침내 나는 해군 함정을 타고 저도로 갔다.” 남 부총리는 8월 7일 서울로 돌아온 뒤 다음 날 아침에 바로 대책을 발표했다.

경제부총리가 대통령 휴가 기간에 멀리 남해안 섬까지 군함을 타고 갔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다. 전쟁이나 북한의 도발 같은 급변 사태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대통령 결재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급한 사정이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는 회고록에서 자세한 속사정을 밝히지는 않았다.

나는 남 부총리가 이 수석의 토지개혁에 제동을 걸기 위해 그렇게 서둘렀던 게 아닌가 짐작한다. 남 부총리는 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보고했을지 모른다. “토지개혁 같은 과격한 조치를 하지 않아도 부동산 투기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남 부총리에 따르면 8·8 조치 내용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해결책은 있구먼”이라며 흔쾌히 결재했다고 한다.

나는 큼지막한 대통령 서명이 있는 8·8 조치 서류의 표지를 직접 봤던 기억이 난다. 그 뒤 토지개혁 작업반은 흐지부지 사라져버렸다. (※이 수석은 넉 달 뒤 농수산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박 대통령에게서 직접 임명 통보를 받은 그는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라 깜짝 놀랐다”는 회고를 남겼다.)

되돌아보면 남 부총리의 생각이 옳았는지, 이 수석의 생각이 옳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듬해 10월 부마민주항쟁과 10·26이 발생하고 박 대통령은 세상을 떠났다. 박정희 정부에서 민심이 떠나게 된 원인으로 부가가치세 도입을 꼽는 사람이 많다. 나는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빈부 격차가 심해진 것도 민심 이반의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본다. 만일 이 수석의 구상대로 토지개혁을 단행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어쩌면 역사가 상당히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스승 같은 상사였던 김재익 국장

박정희 정부의 경제기획원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은 김재익 국장이다. 나는 그 밑에서 5년 정도 사무관 생활을 했다. 직장 상사와 후배의 관계가 아니라 마치 스승과 제자 같은 관계였다.

나는 경제학과를 나왔지만 대학에선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었다. 대학 8학기 동안 정상적으로 등교한 건 딱 한 번(2학년 1학기)뿐이었다. 박정희 정부 때는 학생시위가 심해지면 아예 등교를 못 하게 교문을 막아버렸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며 경제학책을 보긴 했지만 독학이어서 체계적인 지식이 부족했다.

진짜 경제학 공부를 한 건 김 국장 밑에 있을 때였다. 서류 결재를 받으러 국장 방에 가면 김 국장은 결재만 하는 게 아니라 토론을 시켰다. 그러다 자기가 갖고 있던 책을 꺼내 읽어보라고 줬다. 그 중엔 외국책도 있었다. 2~3일 정도 시간을 주며 번역해 보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나한테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그는 많은 후배를 아끼고 경제학 공부도 집중적으로 시켰다.

그때 경제기획원은 정치를 제외한 경제·사회·문화 전반을 기획하는 역할을 맡았다. 군대로 치면 대통령이 사단장, 경제기획원은 참모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4차(77~81년)부터는 경제사회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이름을 바꿨다. 경제기획국장은 그 모든 걸 관할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노동자 경영참가제는 절대 불가”

80년에 전두환 신군부가 국회를 해산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구성했을 무렵이다. 김 국장이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가기 전이다. 어느 날 김 국장이 나를 부르더니 미국 코넬대 교수가 쓴 책 두 권을 줬다. 노동자의 경영참가 제도가 얼마나 문제가 많은지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유고슬라비아에서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장기 집권한 요시프 티토가 주장하던 게 경영참가제였다.

김 국장의 얘기는 이랬다. “국보위 재무분과 위원으로 참여한 김종인 서강대 교수(경제학)가 신군부에 노동자의 경영참가제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이러다가 실제로 경영참가제가 도입될 가능성이 있다. 학자로서 김 교수의 소신은 존중하지만 정책으로 채택되는 건 막아야 한다. 그러니 경영참가제 비판의 핵심 내용을 요약·정리해 달라.” 결국 전두환 정부에선 경영참가제를 도입하지 않았다. 여기엔 김 국장의 강력한 반대도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다시 박정희 정부 때의 일이다. 박 대통령은 매달 경제기획원에 직접 와서 월간 경제동향을 보고받았다. 당시 경제기획원은 현재 광화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건물에 있었다. 필요한 경우 나 같은 사무관이나 과장들도 대통령 보고에 배석했다. 즉석에서 질의응답이나 토론도 이뤄졌다. 그만큼 실무자의 의견을 존중하는 분위기였다.

박 대통령의 대표적 업적으로 경부고속도로나 포항제철(포스코)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수출주도형 경제와 의료보험(건강보험) 도입을 대표 업적으로 꼽고 싶다. 지도자가 뭔가를 만들고 뚫고 하는 건 오히려 쉽다. 더 어려운 건 제도를 잘 설계하고 방향을 올바르게 잡는 일이다. 과거엔 학자 중에서도 수입대체형 경제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강대국에 대한 피해의식이 워낙 강했던 시절이다. 그때 방향을 잘못 잡은 나라는 다 망했다.

70년대 후반 의료보험 도입은 북한과의 체제 경쟁에서 나온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인당 국민소득(GNI)이 2000달러도 안 되던 시절이다.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은 보완할 점도 있지만 세계적으로 자랑할 수준이 됐다. 박 대통령의 공과에 대해선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두 가지는 반드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리·대담=주정완 논설위원, 이정재 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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