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전세 사기, 그 오랜 뿌리
‘본인이 갑의 가옥에 전세를 들어 있었는데 가옥주 갑은 을에게 가옥을 팔고 도망갔음. 갑을 찾아낼 방법은 없는가.’
무려 57년 전인 1966년 4월 5일자 중앙일보 법률상담 코너에 실렸던 모씨의 사연이다. 지면으로 상담해준 변호사는 을에게 집을 내줘야 하고 갑을 상대로는 소송을 제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답한다. 자취를 감춘 갑을 찾을 길이 없을 테니 “귀하의 처지가 딱하게 됐다”는 위로도 잊지 않았다.
전세 사기의 역사는 100년이 넘은 전세 제도만큼이나 유구하다. 1930년대 신문 지면에도 전세 사기범이 등장한다. 경매로 판 집을 3명에게 다시 전세를 주고 수천원을 떼먹은 사건 등이다.
전세 사기는 1960~70년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큰 인기를 끌던 시절이다. 소설 제목처럼 많은 농촌 젊은이가 돈을 벌러 서울로 몰려들었지만 살 집은 턱없이 모자랐다. 이사철마다 10~20%씩 전세가 오르는 게 예사였다.
뛰는 전셋값만큼 사기도 기승을 부렸다. 월세로 집을 빌린 다음 집주인 행세를 하며 전세보증금을 가로채거나, 집을 팔거나 경매로 넘기기 직전 전세 계약을 해 보증금을 챙기고 잠적하는 사건이 빈번했다. 지금도 흔한 전세 사기인데 40~50년 전 생겨난 고전적 수법이다.
세입자에 대한 법적 보호망은 없다시피 했다. 민법에 관련 조항이 있었지만 허술했고 특별법도 마찬가지였다. 주택임대차보호법이 제정된 건 한참 뒤인 1981년이다. 이미 수많은 전세 피해자가 생겨난 이후였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건 없다. 수법은 교묘해졌고 피해 규모만 더 커졌다. 전세 피해 주택 수가 1139채에 이르는 ‘빌라왕’, 3493채로 그보다 많은 ‘빌라신’ 사건까지. 무자본 갭투자로 수천 채를 사들이고 수백억대 보증금을 빼돌리는 사이 법적 제재는 없었다. 집값이 내려가면서 ‘깡통전세’가 속출하고 있고,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피해자도 빠르게 늘고 있다.
그런데 나쁜 임대인 명단 공개, 임차인 대항력 강화 등 내용을 담은 법안은 여전히 국회에서 잠자는 중이다. 정부와 국회에서 전세 사기 피해를 막겠다며 큰소리치지만 바뀐 건 별로 없다. 또다시 “귀하의 처지가 딱하게 됐다”는 위로만 하고 말 건가 보다.
조현숙 경제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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