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터전'이라 부른다…10년 일해도 무경력인 이곳
선생님과 아이들 모두 평어(平語·예의를 갖춘 반말)를 쓰고, 이름 대신 오솔길, 논두렁, 자두 등의 별명으로 서로를 부른다. 4~5명의 교사가 60여명의 아이를 돌보는데도 어떤 수직적인 통솔이나 호통도 울려 퍼지지 않는다. 그저 어른과 아이가 뒤섞여 놀고, 먹고, 교감할 뿐이다. ‘국영수’와 같은 교과목 학습 대신, 놀이와 휴식과 같은 일상이 중심인 이곳을 아이들과 부모는 ‘터전’이라 부른다.
서울 마포구 성미산마을에 자리 잡은 ‘도토리 마을 방과후’의 이야기다. 이곳의 일상, 더 정확히는 이곳 교사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나는 마을 방과후 교사입니다’가 11일 개봉한다.
영화를 만든 건 실제 자신들 자녀를 이곳 마을 방과후에 맡겨온 박홍열·황다은 부부다. 각각 영화 촬영감독, 시나리오 작가로 업계에 잔뼈가 굵은 두 사람은 이 다큐를 공동 연출한 데 이어 배급·홍보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지난 4일 ‘터전’ 근처 한 카페에서 마주한 두 사람은 난생 처음 해보는 영화 배급·홍보 일에 “죽을 것 같다”고 너털웃음을 지으면서도 “다큐를 통해 세상에 드러나지 않던 돌봄 노동자들이 사회적으로 호명되길 바란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이는 마을이 키운다’ 속담 이뤄지는 곳이지만…
‘도토리 마을 방과후’는 2017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공동육아협동조합 형태의 돌봄 기관으로, 5명의 교사가 60여명의 초등 1~6학년 아이들을 돌본다. 초등 저학년 아이들이 하교하는 낮 12시부터 오후 7시까지, 아이들의 방과후 일상을 책임지는 곳이지만, 선생님들은 이곳에서 10년을 일해도 아무런 경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정부 지원 없이 부모들의 조합비로 운영되는 ‘미인가’ 기관인 탓이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마따나 공동육아가 활성화된 성미산마을에 2015년 정착한 박 감독과 황 작가는 5년여간 두 아이를 도토리 마을 방과후에 보내면서도 이런 교사들의 현실에 무감했다고 털어놨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집에서 어머니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을 잘 모르듯이, 선생님들이 하는 돌봄 노동에 대해서도 ‘이분들은 이 일이 원래 좋은가 보지’ 하고 5년을 지냈어요. 그런데 새로 온 선생님들이 1년도 못 채우고 나가는 게 반복되고, 오래 근무한 선생님들도 ‘미래가 너무 불안하다’고 말씀하시는 걸 듣고서야 깨달았죠. 선생님들은 부모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월급도 잘 안 올리세요. 저임금이 계속되다 보니 미래가 더욱 보이지 않는 구조가 이어져 왔더라고요.”(박홍열 감독)
코로나19 돌봄 공백 채웠지만, ‘백신 우선 접종’도 제외
교사들의 어려움을 깨달은 뒤 이들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생각으로 시작된 다큐 촬영은, 2020년 초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예기치 못하게 ‘극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방역을 이유로 문을 닫은 학교와 학원을 대신해 방과후가 아이들을 더 오래 돌봤고, 밀집도를 줄이기 위해 집에 남은 고학년 아이들에게는 간식 꾸러미를 전달하는 것으로나마 온기를 전했다.
하지만 이런 긴급 상황에서도 방과후 교사들은 ‘백신 우선 접종 대상자’에 포함되지 못하는 등 재차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경험을 해야 했다. 박 감독은 “선생님들은 본인 때문에 돌봄에 문제가 생길까 걱정이 돼서 백신을 맞고자 하셨는데, 병원·보건소 어디에 전화해봐도 ‘미인가 기관이기 때문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고 전하며 “이 다큐로 인해 무언가 크게 변할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분들의 존재가 조금이라도 알려진다면 비슷한 문제가 생겼을 때 국가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질 뿐”이라고 말했다.
극적 연출 없지만, “돌봄 함께 하는 ‘체험형’ 영화”
교사들의 어려운 현실을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극적인 화면 연출이나 인터뷰를 활용할 법도 하지만, 영화는 어떤 컷에서도 직접적인 호소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더 나은 돌봄을 위해 교사들이 토론을 거듭하는 모습을 묵묵히 비출 뿐이다. 황 작가는 이런 연출 방법이 “‘아바타2’처럼 관객의 ‘체험’을 유도한 것”이라며 웃어 보였다. 관객들도 마치 방과후의 일원이 된 기분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함께 존재해 달라는 의미다.
“일부러 클로즈업이나 인터뷰는 하지 않고, 회의하는 모습을 오래 보여주려고 했어요. 아이들을 위해 선생님들이 일상적으로 하는 보이지 않는 노력을 드러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처음 찍기 시작했을 때는 카메라를 위에서 높게 들고 찍었는데, 돌봄을 나도 모르게 낮게 바라봤기 때문이란 걸 깨달았어요. 그렇게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갈수록 카메라를 바닥으로 내려서 낮은 자세로 찍었어요.”(박 감독)
영화는 인터뷰 대신, 내레이션을 통해 교사들의 속마음을 담백하게 전달한다. 황 작가가 대표로 녹음했지만, 문장들은 모두 교사들의 말과 글에서 그대로 발췌했다. 교사들이 직접 쓴 글을 모아 『아이들 나라의 어른들 세계』라는 책도 영화 개봉 이튿날인 12일에 출간된다. 영화 개봉부터 책 출판까지, 방과후 교사들을 세상에 알리는 일에 눈코 뜰 새 없는 부부는 “이 과정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관객들에게 닿았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방과후 조합원 열여섯 분 정도가 영화 홍보에 필요한 배너 제작 같은 일을 자발적으로 도와주고 계시거든요. 그래서 저희는 이 다큐를 공동 육아로부터 시작된 ‘공동 출연·제작·배급’ 영화라고 생각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 해서 만든 영화의 진정성이 닿아서 아주 조금씩, 작은 변화들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남수현 기자 nam.soohyo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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