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카드 쓰고 갚을게" 무죄 받은 이 거짓말, 대법이 뒤집었다

김정연 2023. 1. 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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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제를 대신 하기 위해 카드를 가져가서 쓴 친구가, 나에게 사전에 카드 사용을 허락받은 과정에 속임수를 썼다면 그 친구는 법적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기망에 의해 카드를 취득'한 것으로 판단돼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에 해당한다. 사진 연합뉴스


카드 주인에게 ‘형식상’ 허락을 받고 넘겨받은 카드를 사용했더라도, 사용 목적 등을 속여 주인에게서 카드 사용권을 넘겨받은 것이라면 처벌 대상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1부(주심 박정화 대법관)는 지인의 카드를 가져가 대신 결제해 금액을 편취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 대해 여신전문금융업법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고 9일 밝혔다.


“네 카드로 우선 결제, 나중에 갚을게”


피고인 A는 피해자 B와 지인 관계로, A가 B의 변호사비를 대신 내주기로 한 사이였다. A는 “당신 명의의 신용카드로 성공사례비를 우선 지불한 뒤 카드 대금을 금방 갚아주겠다”며 B의 카드를 빌려갔고, A는 이 카드로 약 한 달 사이 총 23회에 걸쳐 약 3000만원을 결제했다. A는 B에게 허락받은 범위 외의 개인적인 용도로도 카드를 썼고, 결과적으로 카드 대금을 갚지도 못해 사기 및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A는 3000만원 중 2700만원은 B의 변호사 선임비 결제였다고 항변했지만, 1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변호사 선임비용을 부담할 것처럼 거짓말해 신용카드를 받았고, 개인적으로 사용한 데다 결국 피해자의 변호사 선임비용도 지급하지 않았다”며 “피해자를 기망해 신용카드를 받았고, 사기죄와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죄가 성립한다”고 판단했다. 여신전문금융업법은 신용카드·사설금융업 등을 대상으로 하는 법으로, 1심은 A가 제 70조 제1항 제4호에서 처벌 대상으로 규정한 ‘강취‧횡령, 기망·공갈 등으로 취득한 신용‧직불카드를 판매‧사용한 자’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네 카드 쓸게' 허락받고 썼으니 무죄→ 대법 "유죄"


그러나 2심은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A가 B에게 ‘변호사 선임비로 잠시만 카드를 쓰고, 나중에 돌려주겠다’ ‘피고인이 피해자의 변호인 선임비를 지불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점을 들어 “카드를 사용한 동기와 경위를 보면, 피해자가 A에게 신용카드 사용 권한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판단한 것이다. 카드 사용대금에 대한 편취행위가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사용 권한을 받은 이상 신용카드 사용 자체를 부정사용이라고 할 수 없다고 봤다.

이 해석은 대법원에서 다시 뒤집혔다. 관건은 ‘기망하여 취득한 신용카드’에 대한 해석이다. 대법원은 “(A씨는) 카드 주인을 기망‧공갈해 사실상 처분권을 취득한 경우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봤다. 거짓말로 취득한 카드 사용권은 무효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카드 빌려 맘대로 써도 과거엔 ‘무죄’


1990년대 들어 신용카드 발급이 확대되면서, 신용카드 부정발급으로 은행 관계자들이 구속되는 일도 있었다. 사진은 1990년 서울 남부지검이 상업은행과 제일은행 관계자들이 무자격신청인 약 600명에게 카드를 부정발급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위반으로 기소한 사건. 중앙포토

이번 대법원 판결의 핵심인 여신전문금융업법(여전법)은 1998년 처음 만들어졌다. 과거 ‘신용카드업법’을 확장 계승한 법이다. 신용카드 사용이 늘고 범죄 방식이 복잡다단해지면서 별도의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전법 70조 제 1항 제4호 ‘강취·횡령하거나, 사람을 기망하거나 공갈하여 취득한 신용카드나 직불카드를 판매하거나 사용한 자’는 2002년 추가됐다. 그 전까지는 위·변조 혹은 도난·절취에 의한 카드 사용만 처벌 대상이었고, 협박으로 카드를 받아내 사용해도 처벌 대상이 아니었다. 이후 2003, 2005년에도 대법원은 절취한 신용카드로 현금을 인출한 행위에 대해 '본래의 용법에 대해 사용했기 때문에 부정사용이 아니다'라고 판단하는 등 처벌규정 적용에 소극적이었다. 협박 끝에 받아낸 카드를 이용해 현금서비스 및 편의점 결제에 사용한 경우에 대해 '피해자들의 뜻에 의하지 않은 점유 이탈'이라며 ‘여전법 제 70조 제 1항 제4호’ 위반을 이유로 대법원이 첫 유죄 판결을 내린 건 2006년에서다.


첫 '유죄' 판결 2006년, 이후 16년간 해석 분분


2006년 대법원 판결의 핵심인 ‘기망하여 취득한 신용카드 사용’의 해석에 대해서도 최근까지 의견이 분분했다.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이주원 교수는 2014년 논문
「'기망공갈하여 취득한 신용카드 사용'의 의미와 판단기준」

에서 ‘기망하여 취득한 신용카드 사용’에서의 취득 절차를 “하자 있는 사용승낙”이라고 풀이했다.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에 대한 조금 더 명확한 기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번 판결로 “피해자를 속여 형식적인 사용권한을 부여받은 경우의 카드 사용이 여신전문금융업법 위반인지 혼선이 있던 하급심에 구체적 판단기준을 제시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법무법인 오킴스 엄태섭 변호사는 “기존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결제를 맡겼는데 신뢰를 역이용해 재산상의 이익을 취하고 신뢰관계를 파탄낼 경우, 금전적 피해보상 뿐 아니라 형사처벌도 가능하다는 뜻”이라며 “기망·공갈로 인한 신용카드 부정사용에 대해 조금 더 중한 형을 적용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든 판결"이라고 덧붙였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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