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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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연구하는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2018년 미국 덴버에서 열린 '평평한 지구 국제학회'에 참석했다.
평평한 지구론까지는 아니지만,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많은 사람이 사실로 믿는 것도 도통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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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부정하는 사람들에 대해 연구하는 철학자 리 매킨타이어는 2018년 미국 덴버에서 열린 ‘평평한 지구 국제학회’에 참석했다. 지구가 둥글지 않고 평평하다고 믿는 것은 기후변화 부정, 백신 거부 등 여러 과학 부정론 가운데서도 단연 최악으로 꼽힌다. 그걸 믿는, 제정신일 리 없는 사람들과의 대화라니 생각만 해도 두렵다. 매킨타이어는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며 48시간 동안 그들과 열심히 대화했지만 한 명도 ‘전향’시키지 못했다.
다만 매킨타이어는 현장에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평평한 지구론은 그들이 실험적 증거를 기반으로 수용하거나 거부하는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의 정체성 자체였다. 이 정체성은 그들의 삶에 목적을 제공한다. 공동체에 가해지는 박해에 대항해 즉각적으로 단합된 공동체를 형성한다. 또 권력을 가진 엘리트들은 모두 부패했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들의 삶에서 마주하는 고난과 상처의 상당 부분을 해명한다.” 결국 그들의 황당한 신념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그들의 정체성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싶다.
평평한 지구론까지는 아니지만, ‘청담동 술자리 의혹’을 많은 사람이 사실로 믿는 것도 도통 이해가 안 되는 현상이다. 지난해 10월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처음 제기했을 때부터 실소가 나왔다.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 김앤장 변호사 30여명이 함께하는 심야 술자리가 벌어질 개연성 자체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전후 사정을 조금만 살펴봐도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뻔히 드러난다. 하지만 이 주장은 계속 ‘의혹’ 대접을 받았다. 제보의 발단이 된 첼리스트가 경찰에 출석해 “그 내용이 다 거짓말이었다”고 진술했을 때 비로소 사건이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조선일보 신년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지지층 10명 중 7명(69.6%)이 여전히 청담동 술자리가 사실이라고 믿는다고 답했다. 다수의 민주당 지지자들은 첼리스트가 본인의 거짓말을 실토한 경찰 진술을 거짓이라고 생각한다는 얘기다. 권력의 압박과 회유로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음모론적 사고다.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는 게 충격적이다. 이들에게 무엇을 더 보여줘야 자신의 믿음이 틀렸음을 인정하게 될까. 본인이 바라는 진실(실상은 ‘대안적 사실’에 불과한 것)이 은폐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어떤 물증이 제시돼도 소용없을 것이다. 매킨타이어는 “(음모론자들은) 믿고 싶지 않은 문제와 관련해선 터무니없이 높은 수준의 증거를 요구하며, 믿고 싶은 것이라면 증거가 빈약하든 혹은 존재하지 않든 상관없이 수용한다”고 지적했다.
정권을 반대편에 내준 상황이 견딜 수 없이 싫고, 그 집권 세력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지 믿고 지지할 준비가 돼 있으니 저런 가짜뉴스를 가짜로 인식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지배의 이상적인 대상은 골수 나치나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사실과 허구, 진짜와 가짜의 차이를 더 이상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런 사람들이 극소수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다수를 차지한다면 심각한 사회적 위기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들처럼 잘못된 신념이 자신의 정체성이 돼버리면 곤란하다. 신념에 반하는 얘기를 하는 순간 존재의 본질을 건드리게 되는데 무슨 수로 설득할 수 있겠나. 매킨타이어는 존중과 배려가 가득한 자세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했지만, 그럴 엄두는 전혀 나지 않는다. 정념이 이성을 잠식해가는 사회의 모습이 암담하기만 하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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