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 칼럼] 면피 사회
힘든 게 맞다.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말이다. 1994년 10월 사형수 10명의 집행 현장(1997년이 마지막이었다)에 초임 시절 입회했던 전직 검사장의 기억. “죽음에 앞서선 다 내려놓고 용서를 구할 줄 알았다. 그러나 다수가 마지막 순간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더라. 사회와 법에 대한 증오가 남은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왜 주범 대신 공범인 나만 가야 하느냐는 원망도 있었다. 그 주범은 당신의 앞 순서였었다는 말만은 차마 하지 못하겠더라. 양치질도 못했는데 왜 이리 급하냐는 불만서부터…. 사회와 남에 대해 응어리져 남은 적개심까지.”
극단적 사례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인간 세상에서도 잘못이란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고개를 숙인 뒤 되돌아올 사회적 소외와 눈총, 뒤이을 정신적·물질적 손실은 두렵기 마련이다. 남의 실수에 대해 유독 관용이 부족한 우리 문화도 큰 몫을 할 터다. 책임지려는 용기를 평가하긴커녕 SNS를 통한 좌표찍기와 신상털기 등 융단폭격을 가한다. 회복과 재기가 어려운 폐인이 될 때까지…. 그러니 내 잘못이 아니라는 모든 구실과 정황을 동원하기 바쁘다. 그 주변에 있던 누군가를 희생양 삼기에 골몰한다. 휴일 교회마다 사제들이 “내 탓이오”를 외치게 하지만 인간은 그냥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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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이 ‘책임회피’ ‘남탓’인 세태
나랏일 공직, 자기 책임 분명해야
자신이 일의 주인이길 포기하면
성장·성공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
」
우리 신문·방송의 뉴스 제목·자막의 오른쪽(혹은 바로 아래쪽)은 늘 ‘면피(免避)’로 채워진다. 제기된 문제의 해결 과정은 실종이다. 공격과 방어만 있다. 나라의 일상 에너지 대부분이 면피에 소모된다 해도 과언은 아니겠다. 아마 경복궁이 무너져도 정쟁과 SNS의 논란 끝에 최종 책임은 결국 ‘부실공사 대원군’이 져야 하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면피가 고착된 나머지 이젠 검찰 수사, 법원의 마지막 심판마저도 부정하려는 혼돈을 맞고 있다.
민초들이야 그렇다 치자. 나랏돈 쥐어주고 나랏일 맡긴 공직은 그 권한만큼 명확히 책임져야 순리다. 한 발 쏘는 데 20억원 든다는 군의 현무2-C 미사일이 훈련 발사 직후 뒤로 날아가 인근 골프장 페어웨이에 떨어진다. 북핵에 대응할 주력 무기였다. 전시의 국민 안위에 관련된 중대 문제다. 그러나 3개월 넘도록 군, 방사청, 국방과학연구소, 제조업체 중 누가 책임을 말하거나 어떤 점검, 보완이 추진 중인지 알 길이 없다. “무기 제작상 일부 장치 결함으로 추정된다”는 합참의장의 한마디가 전부다. 제작상 결함이라니. 유체이탈이다. 무인기 용산 상공 침투는 면피를 넘어 ‘은폐’ 의혹마저 일고 있다.
159명이 목숨을 잃은 이태원 사고 이후 단 한 명의 공직자도 “내 탓이오” 외친 이가 없었다. 지난 6일 이상민 행안장관이 정부 대표로 사과하기까지 두 달 넘게 용산의 구청장·경찰서장 강제 구속이 전부였다. 지난 정권의 소득주도성장, 탈원전, 징벌적 부동산 정책 입안·추진으로 꽃길을 달렸던 문재인의 사람들(김상조·김수현·김현미·홍장표)이 다시 모여 정책 성과를 계승한다고 한다. ‘책임’ 아닌 ‘계승’이다. 그 포럼 이름은 다산이 강진 유배 때 기거했던 사의재(四宜齋). 18년 유배 중 다산이 친족·제자들에게 보낸 성찰의 편지엔 이런 구절이 있다. “폐족들은 글공부를 하고 행실을 삼가 착한 본성을 지켜나가지 않을 바엔 차라리 오그라들어서 없어져버려야 한다. 그자들과 관계가 있다 하여 멀리 끊어버리지 않으면 큰 낭패를 당할 것이다.”
우리 곁엔 유독 책임회피 속담들이 많았다. 26개라는 통계도 있다. “핑계없는 무덤 없다” “처녀 애 낳아도 할 말은 있다” “서투른 목수 연장 탓, 서투른 무당 장고 탓한다” “글 못하는 사내 필묵 탓, 떡 못하는 계집 안반(案盤, 떡 등을 치는데 쓰이는 나무받침) 탓, 장님 넘어지면 지팡이 탓” “잘살면 제 탓, 못살면 조상 탓 산소 탓” “밥 질면 나무 탓, 늦잠 잔 며느리 탓.” 지금의 1등 속담? 역시 ‘내로남불’이다.
학자들은 그 원인을 생각해 봤다. 장유유서, 군사부일체의 수직적 유교 문화 아래 자신의 선택과 자유란 게 미미했다. 집단에 숨는 자기 부재의 복종 속에서 자기 책임은 명확지 않았다. 억눌린 인간의 생존? 핑계로 방패삼는 것이었다. 자아 확대가 아니라 자아 도피가 체질화돼 공과 사, 이성과 감정 구분이 어려워졌다는 해석이다. 해방 이후에도 친일 세력에 명확한 책임을 묻지 못했다거나 군부독재 시절의 정경유착, 부동산 투기 등 부정한 수단들이 여과없이 부로 이어진 세상에서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체념적 현실 도피가 굳어져 왔다는 해석도 나온다.
책임을 피하는 건 곧 자기가 그 일의 주인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잠시, 아니 운 좋으면 영원히 화와 손실을 피할 수 있겠다. 하지만 주인이기를 늘 포기하는 이들에게 일의 기회, 성찰과 성장의 시간, 그리고 다시 이익이 주어질 가능성이란 없다. 정치인·공직에 특히 요구되는 으뜸의 덕목. 실명의 정책과 자기 책임이다. 주인이길 포기하는 이들에게 어찌 나라 책임을 맡길 수 있겠는가. 새해엔 면피 사회에서 벗어나 스스로 책임지는 사회로 조금씩 성숙해져 가길 바란다.
최훈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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