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광주시장·전남지사, 조선대 설립 앞장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김삼웅 2023. 1. 8.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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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익세력에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에게 오랜 동지 최순주가 상경할 것을 권해왔다.

월파는 고흥 동강 출신이고, 발철웅은 이웃 면인 남양 출신으로 동향이어서 광주시장을 할 때 서무과장을 맡겼다가 함께 옮겨간 것이다.

박철웅을 비롯하여 지역의 유지들이 '조선대학 설립 동지회'를 창립하여 회원을 규합하고 회비를 수금할 때 월파는 전체 시군에 지사 명의의 협조 의뢰 공문을 지원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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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10] 그의 한결 같은 꿈은 조국독립과 함께 국민교육이었다

[김삼웅 기자]

▲ 제6대 대통령선거 서민호 후보 벽보 1967.05.03. 제6대 대통령선거일 선거운동 벽보
ⓒ 중앙선관위
 
좌익세력에 몰렸다가 구사일생으로 풀려난 그에게 오랜 동지 최순주가 상경할 것을 권해왔다. 그는 미군정청 재무고문으로 일하고 있었다. 항일운동에 참여했던 동지들이 중앙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했지만, 광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듬해 초대 광주시장에 이어 전남도지사에 부임하였다. 

뛰어난 영어 구사와 좌익 척결 능력은 미군정의 신임을 얻기에 충분했다. 1946년 10월 광주시장(당시 용어로는 광주부윤)에 임명되었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1년 만에 전라남도 지사로 취임해서도 좌익 계열에 대한 배척을 늦추지 않았다. 광주지역의 유지였던 최영옥ㆍ이은상 등이 안재홍 민정장관에게 월파가 지나치게 독선적이고 우편향이어서 도민의 반발이 크다고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정 당국은 월파를 강원도지사로 전출시켰으나 월파는 이를 거절하고 사표를 제출하였다.

월파는 시장과 도지사 재직시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하였는데 광주시장으로 있을 때는 제1수원지 확장, 학강국교 신축, 시청사 신축 등을 급속히 추진하여 '폭군 시장'의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그의 한결 같은 꿈은 조국독립과 함께 국민교육이었다. 나라가 망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국민이 깨어 있지 못한 데 있다고 믿었다. 미국ㆍ유럽의 선진화된 기관을 지켜보고 더욱 굳어진 결론이었다.

해외 유학에서 돌아와서 벌교의 유일한 사립 민족학교이던 송명학교를 인수받아 운영했던 것이나, 연희전문·보성전문에 거액의 장학금을 기부한 것도 이같은 의지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그는 국민교육을 위해서는 좋은 교육기관(학교)의 설치가 시급함을 절감하였다. 이같은 생각은 망명 애국지사들의 일치된 신념이기도 했다.

성재 이시영은 환국하여 신흥대학(경희대학 전신)을, 해공 신익희는 국민대학을 그리고 백범 김구는 창암학원 등을 설립했다. 이밖에도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학교는 더 있었다.

서민호는 전남지사에 부임하여 해방 직후의 산적한 현안들을 처리하는 한편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대학 설립에 열정을 바쳤다.

해방 이후 급선무 중의 하나는 새 나라를 이끌어 갈 인재의 양성이었다. 변변한 대학이 없었던 전남에서는 지역 인사를 중심으로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월파가 광주시장에서 전라남도 지사로 취임하면서 박철웅을 전라남도 운수과장으로 발탁하였다. 월파는 고흥 동강 출신이고, 발철웅은 이웃 면인 남양 출신으로 동향이어서 광주시장을 할 때 서무과장을 맡겼다가 함께 옮겨간 것이다. 

박철웅을 비롯하여 지역의 유지들이 '조선대학 설립 동지회'를 창립하여 회원을 규합하고 회비를 수금할 때 월파는 전체 시군에 지사 명의의 협조 의뢰 공문을 지원하게 하였다. 

도지사의 지원에 힘입어 1946년 8월 하순 광주서중학교 강당에서 설립동지회가 만들어졌으며, 9월 29일 지역의 학교를 빌어 광주야간대학원으로 개교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고문인 서민호 지사가 광주야간대학원을 조선대학원으로 개칭 허가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이 있자, 수많은 유지와 도민들이 설립 기금을 냈다.

1947년부터 시작된 회원 모집은 1948년 봄에는 7만 2천여 명의 회원과 1054만원의 설립 기금을 확보하게 되어 1948년 5월 26일 미군정청 문교부로부터 재단법인 조선대학의 설립 허가와 동시에 조선대학원은 조선대학으로 인가를 얻어 정규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주석
5> 박병섭, <민족교육의 실천자, 월파 서민호>, <전남교육>, 188~189쪽, 2007년 12호.
6> 앞의 책, 186~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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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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