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사회에서 금기에 가까운 중화민국의 '국기'
[김찬호 기자]
회사를 다닐 때의 기억입니다. 저는 업무의 특성상 외국 기관들과 접촉해야 할 일이 종종 있었는데 어느날 공문 한 통이 내려왔습니다. 외국 기관과 접촉할 때 주의사항을 적은 문건이었습니다. 대부분 아주 기본적이고 의례적인 내용이었는데, 한 항목이 눈에 띄었습니다. "국기 등 사용에 주의"라고 적힌 항목 밑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유사한 국기를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 OO 등 미승인 국가의 국기를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
OO으로 이름이 지워져 있어서 이게 대체 어느 나라를 말하는 것인지 잠깐 고민하다가 깨달았습니다. 대만이구나. 중화인민공화국 측에서 꺼려하는 중화민국의 국기, 청천백일만지홍기를 사용하지 말라는 지침이었습니다. 그걸 깨달은 순간, 중화민국과 별 관련이 없는 저인데도 왠지 가슴이 쿵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국제사회에서 중화민국의 국기는 금기에 가깝습니다. 중화민국은 올림픽에도 올림픽 깃발을 따로 만들어서 '차이니스 타이베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하지요. 일부 항공사에서는 홈페이지에서 다른 나라의 국기는 표기하면서 중화민국의 국기만은 표기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 대만대학교 안에 걸린 청천백일만지홍기 |
ⓒ Widerstand |
물론 이곳 타이베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리와 유적, 관공서 곳곳에 걸려 있는 중화민국의 국기를 보며 저도 모르게 어색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냥 국기일 뿐인데, 이 국기를 당당히 걸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설익은 탓입니다. 그러나 중화민국이라는 이름도, 청천백일만지홍기라는 국기도, 이 타이완 섬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만족스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현재 중화민국의 인구는 2300만 명 정도입니다. 이 가운데 아주 오래 전부터 타이완 섬에서 살고 있던 '원주민'의 인구는 2%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 사람들은 수많은 민족으로 나뉘어 있고, 각 민족에 따라 다른 언어를 사용하지요. 그럼 나머지 98%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중국 대륙에서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명나라나 청나라 때, 주로 복건성 인근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본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오랜 기간에 걸쳐 무역이나 교류를 통해 천천히 넘어온 사람들이니 그 숫자가 많고, 현재 대만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본성인들은 주로 복건성 출신인 만큼 복건성에서 사용하는 중국어 방언인 '민남어'와 유사한 '대만어'를 사용합니다. 방언이라고는 하지만 중국의 땅이 워낙 넓고 대만 섬으로 넘어오면서 또 한 번 변화를 거쳤으니, 현재의 중국어와는 거의 다른 언어가 되어버렸지요.
나머지는 10% 정도의 사람들은 국공내전 시기 국민당과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으로 넘어올 때 함께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을 '외성인'이라고 부릅니다. 숫자는 적지만 중화민국의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타이완 섬으로 넘어온 다음에도 주로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흔히 북경어라고 부르는 표준중국어를 사용합니다. 본성인과 외성인은 모두 한족이지만, 이주 시점과 언어에서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권력을 쥐고 대만을 지배하던 외성인과, 나머지 본성인, 원주민 사이의 갈등은 여전히 뿌리깊습니다. 지금이야 표준 중국어가 많이 보급되어 젊은 층에서는 본성인인데도 대만어가, 원주민인데도 자기 민족의 언어가 서툰 경우가 있다고 하지만 초기에는 의사소통조차 되지 않았으니 그 갈등이 더욱 심했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갈등의 뿌리와 같은 사건이 2.28 사건입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중화민국은 천이(陳儀)라는 사람을 보내 원래 일본이 지배하고 있던 타이완 섬의 행정권을 이양받도록 했습니다. 타이완 섬에 살고 있던 주민들은 일본의 패망을 환영했을지 모르겠지만, 중화민국의 지배는 일본의 지배와 별반 다를 바 없었습니다. 특히 국민당이 공산당과 내전에 들어서면서 부패와 식량난, 인플레이션은 만성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대만어를 쓰는 본성인들에게 북경어를 쓰는 중화민국의 지배자들은 이민족이나 다름없었죠. 일본이 남기고 간 공장과 기업들도 대부분 외성인들에게만 불하되었습니다. 반면 중화민국의 입장에서는 오랜 기간 일본의 지배를 받아온 타이완 섬의 본성인들이 일본에 협력한 부역배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세력 사이의 갈등은 늘 그렇듯 우연한 계기로 폭발합니다.
1947년 2월 27일, 국가가 독점으로 판매하고 있던 담배를 몰래 판매한 혐의로 '린장마이(林江邁)'라는 여성이 적발됩니다. 경찰이 폭력적으로 단속하자 이것을 본 시민들이 경찰에게 항의했고, 경찰과 시민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경찰은 실탄을 발포합니다. 여기에 천원쉬(陳文溪)라는 학생이 맞아 병원으로 이송되죠.
그리고 다음날인 2월 28일, 천원쉬가 사망하고 그 소식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대만인들이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천이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해 시위에 참여한 대만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합니다. 시위가 소강 상태에 들어간 뒤에도 천이는 중화민국에 군대 파견을 요구했습니다. 국공내전 중이었음에도 중화민국은 타이완 섬에 군대를 파견했고, 진압이라는 탈을 쓴 학살은 계속됩니다.
계엄령은 두 달 만에 해제되었고, 그 사이 수만 명의 시민이 학살당했습니다. 중화민국은 곧 국공내전에서 패배했고, 2년이 지난 1949년 타이완 섬에 다시 계염령을 발령하고 타이완 섬으로 정부를 옮겼습니다. 1949년 이후 타이완 섬에서 실시된 중화민국의 정치도 그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 계엄령은 1987년까지 이어졌고, 국민당은 장제스를 중심으로 독재정을 꾸렸습니다. 2.28 사건은 그렇게 잊혀져야만 했지요.
장제스는 1975년 사망할 때까지 총통직을 유지했고, 그 자리는 아들인 장징궈에게 세습되었습니다. 헌법은 효력이 중지되었고, 국회의원 선거는 치러지지 않았습니다. 야당의 창설이 불법화되었고, 총통은 간선제로 선출되었습니다.
야당인 민진당은 1989년에야 합법화되었고, 선거 다운 선거는 1991년에야 처음 치러졌습니다. 국가의 수반인 총통을 처음 직선제로 선출한 것도 1996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그 독재의 시기, 억압 받았던 '대만인'들에게 중화민국이라는 이름과 청천백일만지홍기는 그리 기꺼운 상징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 228화평공원 |
ⓒ Widerstand |
반대로 이 나라는 중화민국이 아닌 대만이며, 대만에는 중국이 아닌 대만만의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수가 본성인이나 원주민이며, 완전히 일치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민진당을 지지하는 시민들은 주로 이런 세력입니다.
'중화민국'이라는 이름과 청천백일만지홍기라는 깃발 아래에서 중화민국 정부가 이 섬의 시민들에게 가해왔던 폭력과 억압의 역사를 알고 있다면,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이 달갑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중국 대륙, 예를 들어 산둥성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생각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닌 중화민국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특히 해외에 거주하는 화교 인구들 중 그런 분들이 많지요. 이런 분들의 모순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 228화평공원 |
ⓒ Widerstand |
그 덕에 저는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중화민국의 시민들이 민주적 의사에 따라 선택한 바를 따르자고요. 2018년 중화민국은 국민투표를 통해 2020 도쿄올림픽에 '대만'의 이름으로 참여할 것인지를 국민에게 물었습니다.
▲ 228 사건의 희생자 명단 |
ⓒ Widerstand |
▲ 중화민국 총통부 |
ⓒ Widerstand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