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게 집과 정치자금 대주고 특혜받은 사업가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3. 1. 8.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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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친일파의 재산 - 백낙승

[김종성 기자]

 1935년 금강산 여행 중에 찍은 가족사진. 앞줄 맨 왼쪽이 백남준이고 그 뒤로 부친 백낙승이다.
ⓒ 백남준아트센터
예술가 백남준(1932~2006)은 해방 이후의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 사장의 아들이었지만, '경영을 배우라'는 아버지의 권고를 저버리고 자기만의 세계를 선택했다. 백남준은 자신이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게 된 계기 중 하나를 17세 때의 홍콩 여행으로 설명했다고 한다.

한국현대미술학회장과 고려대 교수 등을 역임한 미술 평론가 이용우는 저서인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에서 "백남준은 홍콩 여행에 관한 기억을 더듬는 어느 글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당시를 회상해내었다"라고 한 뒤, 1949년에 영어 통역을 위해 아버지의 여행을 따라간 백남준이 겪은 일들을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번호 7번이 찍힌 여권을 들고 홍콩으로 떠난 백남준은 비행기에서 아버지에게 접근한 인도인의 실제 직업이 무기 상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회고했다. 또 그 뒤 싱가포르에서 아버지를 찾아온 사람의 짐 속에 체코제 자동소총이 가득 들어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백남준의 기억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공식적인 사업과 별도로 이승만 정권을 위한 무기 밀매업에도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49년이면 이승만 대통령이 형식상으로는 국방부에 연결되지만 실제로는 사병 부대나 다름없었던 20만 규모의 청년방위대 조직을 추진하고 있을 때였다.

국군과 별개의 군사 조직인 청년방위대는 한국전쟁 직전인 1950년 3월 15일 편성됐다가 갑작스레 발발한 전쟁의 와중에 해체됐다. 조직 가동에 필요한 채비를 갖추기도 전에 전쟁이 터졌던 것이다. 백남준의 아버지가 6·25전쟁 전년도에 무기 밀매에 관여했다면, 청년방위대와 관련된 것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이 국군과 관련된 것이었다면 은밀한 활동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위 책에 인용된 백남준의 글에 따르면, 정권과 연루돼 비밀 무기 거래에 관여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에게 실망을 주었다고 한다. "사업을 하기 위해선 로비를 해야 하고 거짓말을 태연하게" 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도 과감하게 정경유착

백남준의 아버지 백낙승은 동학혁명 및 청일전쟁 2년 뒤인 1896년에 출생했다. 조선왕조의 특권 기업인인 시전 상인 백윤수의 넷째아들로 태어난 백낙승은 일본 메이지대학과 니혼대학을 졸업한 뒤 백윤수의 사업 경영에 참여해 이를 확장시키는 데 기여했다.

로비하는 아버지에게 실망했다는 백남준의 회고처럼, 백낙승의 사업 경영을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정경유착이었다. 1966년 11월 16일 자 <매일경제> 기사 '삼성재벌 일대기 (35)'는 "백낙승 사장은 돈암장을 이 박사에게 저택으로 제공하고 정치자금도 대어주어 이 박사를 도와주었다"라며 "이승만 대통령은 백낙승씨에게 정부$ 5백만$를 대여하여 사업자금으로 쓰도록 특혜를 주었다"라고 말한다.

백낙승은 이승만과의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 보유 달러를 특혜 대출받는 데 성공했다. 위 기사는 태창방직이 그 돈으로 구입한 시설이 삼성그룹 제일모직에 넘어갔다고 말한다. 백낙승은 그 돈을 제대로 갚지 못했다. 이는 정부의 상환 독촉 속에 태창방직이 기울게 된 계기였다.

이승만 역시 결국에는 후원자 백낙승에게 부담을 느꼈다. 막판에 백낙승을 버린 사람은 이승만이었다. 1955년 12월 8일 자 <경향신문> 기사는 이승만의 지시하에 재무부 사세국(국세청)이 "태창산업을 급습하고 직물공장과 동(同) 본사 그리고 사장 및 중역들의 가택을 수색하였다"라고 보도했다. 이것은 백낙승 사망 10개월 전의 일이다. 59세의 백낙승이 정경유착의 허망함을 느끼게 할 만한 일이었다.
 
 <경향신문> 1955년 12월 8일 자 기사 "압수된 장부만 사입 '태창에 탈세혐의 메스'"
ⓒ 경향신문
 
백낙승은 니혼대학 재학 시절부터 경영에 관여했다. 아버지 백윤수가 대창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한 1916년에 20세 나이로 회사 이사에 선임됐다. 그 뒤 집안의 회사나 자기 명의 회사를 발판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 시절 백낙승의 경영 방식에서는 이승만 정권 때 했던 것과 똑같은 스타일이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때도 과감하게 정경유착을 했던 것이다.

기업인들의 전형적인 친일 방식인 기부금 헌납 역시 그의 경영에서 빠지지 않았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펴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7권은 "1939년 국방헌금 1만원, 1941년 해군기 제작비 7만 5천 원과 비행기 1대 등 10만원 이상을 기부"했다고 설명한다.

일본군의 진주만 기습 7일 뒤에 발행된 1941년 12월 15일 자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동대문경찰서를 찾아가 신원을 밝히고 해군기 제작비 7만 5천원을 헌납한 백낙승이 본인이 아닌 부인의 입을 통해 기부 소감을 세상에 알리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다.

'감동적인' 기부 소식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부인은 남편이 출타 중이라며 "나라의 거룩하신 은혜를 갚기 위하여 국방헌금을 해야겠다고 그 전부터 벼르던 차에 이번 큰 전쟁이 일어나자 곧 수속을 취한 것"이라며 남편이 평소에 했다던 말을 들려줬다. 위 기사는 "가정에는 5남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며, 태창직물은 대대로 경영하여 계승한 것이라고 한다"라며 '기부 천사' 백낙승의 가정을 행복하게 묘사했다.

'거룩한 은혜'를 갚기 위해 헌납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백낙승은 친일을 통해 커다란 이문을 님겼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의 세계침략정책에 보조를 맞춰 군수산업으로도 영역을 확장했다. 일본과의 협력 덕분에 훨씬 큰 이문을 내는 분야로 진출하게 됐던 것이다.

해방 직후 주요 세력들과 두루두루 유착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백낙승 편은 "주로 직물업에 주력하다가 전시체제기에 중공업 분야로 진출하여 군수업체를 운영했다"라며 "1942년 6월 125만 원을 투자하고 조선도변주공주식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해 조선총독부의 국책 사업인 소형 용광로 제철사업을 수행했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1944년에는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군수생산 책임자가 됐다. 또 조선업에도 진출했다. 같은 해에 강원조선철공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이 회사는 일본 정부의 관리하에서 선박을 제조하는 기업이었다.

또 화신백화점 사장으로 유명한 친일재벌 박흥식과도 손을 잡았다. 위 사전은 "1944년 8월에 박흥식이 주도한 군수업체인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주식 2만 주를 인수하여 회사 설립에 참여하였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그는 친일행위를 통해 일본 군수산업에도 참여하고 곳간을 불려 나갔다.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집권기에 백낙승은 기본적으로 한 곳만 바라보면서 정경유착을 했다. 두 시기에 그는 지배적인 하나의 세력만 바라보며 정경유착을 이어갔다. 그런 그를 헷갈리게 만들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도록 만드는 상황이 해방공간에서 있었다. 해방 직후의 혼란한 좌우 대립이 그의 두 눈동자를 바쁘게 만들었던 것이다. <친일인명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해방 후 한민당에서 활동하는 한편 인민당 본부에 사무실을 제공했다. 특히 이승만과는 정치자금 기부 등을 통해 친분을 쌓았다. 1947년 12월 국제연합조선준비위원단 환영준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친일 보수세력이 주도하는 한국민주당에도 몸을 담고, 독립운동가 출신의 좌파들이 많은 인민당에도 사무실을 제공했다. 이승만에게는 돈암장과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그에 그치지 않고 국제연합 대표단을 환영하는 준비모임에도 가담했다.

그는 해방 직후의 남한 땅에 영향을 미친 주요 세력들과 두루두루 유착을 했다. 이 시기의 백낙승이 정치세력들의 동향을 얼마나 면밀히 체크했을지를 느끼게 해주는 장면들이다. 그런 그를 보면서 아들 백남준은 사업이란 저런 것이구나 하면서 염증을 느껴갔다.

백낙승은 해방공간에서 뻔뻔한 일도 벌였다. 한국 착취에 가담했던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인 이른바 적산에도 손을 댔다. 위 사전은 "적산 기업인 조선기계제작소의 관리인으로 활동했다"라고 말한다. 무주공산이 된 적산 기업을 자기 수중에 뒀던 것이다.

1949년 2월, 그는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돼 종로경찰서에 수감됐다. 하지만 불기소로 도로 나왔다. 그 뒤 이승만 정권의 특혜를 받으며 사업을 확장하던 그는 정부의 채무상환 독촉 속에 사업이 기우는 것을 지켜보다가 1956년 10월 12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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