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세대나 OK! 낡은 문래동이 보여주는 관용 [우리 도시 에세이]
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이영천 기자]
오랜만에 찾은 문래역 주변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모의했다던 군부대는 공원으로 변해있고, 널따랗던 방적공장과 주변은 아파트가 숲을 이뤄 키재기하고 있다.
▲ 철강산업 상징 문래동 3가 경인로에 면한 길가에 세워진, 문래동 철강산업을 상징하는 조형물. |
ⓒ 이영천 |
소리가 먼저였다. '문래가 물래'로 동화되는 음운현상처럼, 공간을 그득 채운 쇳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시퍼런 용접 불꽃이 두꺼운 철판을 자르거나 이어 붙이고, 퉁퉁 탕탕 쇳덩이 부딪는 소리가 골목을 흔들어 댄다.
차 다닐만한 길은 트럭으로 꽉 차고, 칸마다 작업장엔 노동자 손길이 분주하다. 소리는 분명 각박한 노동자의 삶들이 부딪치는 파열음일 터다. 척박한 도시에서 살아남으려 몸부림치는 그들에게 이 공간은 어떤 위안을 주고 있을까.
옛 대한주택공사 모체, 영단주택
▲ 영단주택 골목 영단 주택단지를 조성하면서 길게 구획된 획지에 3렬로 집을 짓고, 집과 집 사이에 1m 너비의 골목을 내었다. 그 골목 중 하나. |
ⓒ 이영천 |
이 긴 획지에 3열로 집을 짓고, 집 사이엔 1m 너비 보행자 공간을 두었다. 이 특이한 단지가 문래동 4가를 이루고 있는 '영단주택'이다. 이 단지를 지은 '조선주택영단'이 옛 대한주택공사 모체였다.
일제는 한반도를 대륙침략 전초기지로 삼으려, 1920년대부터 섬유, 식품, 피혁 등 경공업 위주로 피식민지 산업구조를 재편시킨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보급품 조달 목적이다. 그중 한 곳이 영등포 일대다. 따라서 영등포엔 이들 산업의 숙련 노동자들이 넘쳐난다.
중일전쟁을 치르며 태평양 전쟁을 준비하던 일제는 숙련 노동자를 관리할 필요가 절실했다. 전시 강제 동원이 횡행하던 당시, 일본의 그것을 그대로 가져와 1941년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한다. 안정적인 전시 보급 체계를 마련하기 위한 포석이다. 이때부터 전쟁용 주택인 영단주택을 짓는다. 한강 이남엔 문래동 651호, 상도동 1067호, 대방동에 464호가 건설된다.
▲ 문래 4가 영단주택의 큰 길 중 하나인 문래동 4가의 길거리 모습. 멀리 문래동 교회가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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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규모를 갑(20평), 을(15평), 병(10평), 정(8평), 무(6평)로 구분하여 민족과 계급으로 차별한다. 갑과 을은 분양으로 일본인 관리 몫, 임대인 병, 정, 무는 조선인 직원과 노동자 몫이다. 갑, 을, 병에는 욕실을 정, 무는 50호 단위로 공동목욕탕을 두었다.
주택이 공장으로 변했을 뿐, 영단주택 흔적이 문래동 4가에 그대로 남았다. 1960년대까지 가내수공업형 섬유공장이 이를 차지했었고, 1970년대 청계천에서 철공소 등이 이주해오면서 현재 토지이용으로 굳어진다. 크고 작은 기계·금속 공장과 점포 일색이다. 구로공단으로 불리던 굴뚝산업 대부분이 남동, 반월, 시화공단으로 빠져나갔어도 문래동 철강산업은 특유의 생명력으로 이곳을 지키고 있다.
문래 창작촌
문래동 3가 큰길가에 이곳을 아우르는 공간 '문래 창작촌' 안내판이 보인다. 옛 방적공장 자리 남단 작은 언덕에, 두엇이 걷기에도 벅차 보이는 너비의 일정 간격으로 난 곧은 골목이 빼꼼 얼굴을 내민다.
▲ 문래 창작촌 서측 크고 작은 철강 공장 사이로 난 좁은 골목 곳곳에 그려진 벽화가 이곳의 상징이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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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바뀌어 간다면 이곳에도 젠트리피케이션 바람이 불어올까? 아니면 공장들이 자리를 지키며 이를 막아낼까? 허름한 벽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곳에 둥지를 튼 예술가들 흔적이다.
▲ 공장과 게스트 하우스 문래 창작촌의 한 공간. 철강공장과 게스트 하우스가 공존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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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에서 시퍼런 불꽃이 퍼덕이고, 쿵쾅거리는 쇳소리가 요란하다. 공장은 단층부터 3∼4층까지 단조로운 입면이고, 한 바퀴 빙 도는 도로에 면하여 일백 수십의 공장이 마주하고 있다.
▲ 문래 창작촌 문래 창작촌의 전형. 철재 셔터에 그려진 그림과 그 옆 다른 기능이, 예술가 공간과 철강공장이 공존하면서 이뤄낸 이곳의 전형적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
ⓒ 이영천 |
철공소와 예술가의 만남. 무척이나 이질적으로 보인다. 예술가들 발길에 철공소의 첫 반응은 어땠을까? 무척 궁금해지는 지점이다. 그러나 2십여 년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보완적 존재로 공생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간판이며 벽, 셔터에 그려진 그림들이 그 증거다. 철공소건 예술가건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본질은 똑같다. 기계적 기능에 충실한 결과물이냐 창작이냐의 차이만 존재할 뿐이다.
▲ 코 짧은 피노키오 어느 예술가가 이곳의 쇠로 만든 심오한 표정의 피노키오. 문래 창작촌 갈림길에서 행인을 맞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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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길가 보도에 나 앉은 짤막한 코의 피노키오 표정이 심오해 보인다. 사람이 되고자 했다던 동화 속 이야기처럼, 진짜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엄청난 용기와 신념이 필요한 세상이라는 데에 생각이 가닿는다. 각박하다.
철강 골목
▲ 갤러리 골목 문래동 우체국 왼편 골목 안에 있는 갤러리. 정갈하고 차분한 분위기가 문득 주변 철강 공장과 이질적으로 보이나, 긴 시간 공생하는 공간이다. |
ⓒ 이영천 |
우체국을 마주 보고 왼편 골목으로 접어든다. 비좁으나 정갈하고 차분하다. 방송을 탔음직한 오래된 식당 옆으로 앙증맞은 아트 갤러리가 보인다. 골목 벽엔 지난 계절에 열린 여러 행사 홍보지가 붙어있다. 옆으로 제법 규모를 갖춘 또 다른 갤러리가 보인다. 문래동 저녁을 밝힌다는 전등이 공중에 매달려 흔들흔들 재잘댄다. 둥근 화분을 차지한 키 작은 나무만이 추운 계절임을 실감하게 한다.
▲ 철강 골목 안 문래동 철강 골목의 과거와 변화하는 현재가 공생하는 모습. 공간 천이가 진행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골목이다. |
ⓒ 이영천 |
도시공간은 시간의 퇴적층이다. 매 시공간을 살아낸 여러 층위 삶이 퇴적되어 있다. 문래동은 그런 흔적이 가장 뚜렷이 남은 곳 중 하나다. 퇴적의 표층에는 철강산업과 예술 창작촌이 공존·공생하고 있다. 이 표층을 지워내려는 시도가 없는 바도 아니다. 재개발을 유도하는 플래카드에서 이를 쉬이 유추할 수 있다.
이곳은 준공업지역이다. 안양천 변 우안을 차지한 준공업지역 벨트는 옛 구로공단 흔적이다. 공단은 디지털산업단지와 업무지구로 변하였고 지금도 변하는 중이다. 그런 측면에서 문래동이 고유 생태계를 지켜낼 수 있었던 힘은, 작은 필지로 분할된 토지의 필지 때문으로 추정된다. 작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생명력의 근간이 되는 공간 특성은 그 무엇보다 '뭔가를 만들어냄'에 있다. 만들어냄은 그게 부가가치든 예술이든 세상을 지탱하는 힘이다. 문래동이 이런 힘을 잃지 않는 한 공간의 생명력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낡았지만 승화하는 문래동에서, 진흙 속에서 피어나는 꽃을 보듯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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