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민 떼죽음의 진실, 이 사람의 용기 아니었다면 [제주 사름이 사는 법]

황의봉 2023. 1. 7.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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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사름이 사는 법] 양조훈 4·3위원회 위원

제주가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인구 구성이 다양해지고 문화예술의 향기가 풍성해졌는가 하면, 땅과 바다가 환경파괴로 신음한다는 경고음도 들린다. 4·3의 상처가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는 한편으로는 새 공항 건설을 두고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천혜의 땅 제주도를 살기 좋은 평화의 섬으로 만들기 위해 각자의 분야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제주 사름(람)을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기자말>

[황의봉 기자]

▲ 양조훈 4.3위원회 위원 1948년 제주4.3의 광풍이 몰아치던 무렵 태어난 양조훈은 1988년 특별취재반장을 맡으면서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 황의봉
여기 제주 4·3과 운명적으로 조우하여 반평생을 함께한 제주사람이 있다. 양조훈(75) 4·3 위원회(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위원. 4·3의 광풍이 최고조에 달해 제주섬이 킬링필드로 치닫던 1948년 12월 세상에 태어난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 그의 생가는 공교롭게도 당시 한라산으로 들어간 무장대를 진압했던 토벌군 책임자의 관사 바로 옆집이었으니 이 또한 우연이라기보다는 뭔가 질긴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양조훈이 4·3과 만나게 되는 운명의 시간은 1988년, <제주신문> 사회부장이던 나이 40세 때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제주도에도 민주화의 여파가 몰려들었고 자연스레 금기시됐던 4·3 진상규명의 요구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4·3 취재는 특별법 제정과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로 이어졌고, 마침내 진상조사보고서에 근거해 대통령의 공식사과를 이끌어냈으며, 최근엔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국가 보상에까지 이르렀다. 양조훈은 이 모든 장면의 한가운데 모습을 드러냈다.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좌익 무장대가 관공서를 습격하자, 이에 대응한 군경 토벌대의 초토화작전 과정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된 비극적 사건이 바로 제주 4·3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 25만∼30만의 10%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군경 토벌대에 의한 희생자가 86%, 한라산으로 도피한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가 14%로, 말 그대로 동족상잔의 민족적 비극이다. 아직도 4·3은 제주도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현재진행형으로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양조훈은 지난해 1월 4·3 평화재단 이사장 임기를 마치면서 4·3과의 오랜 동행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대하소설과도 같았던 그의 4·3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하소설 같았던 그의 이야기
 
 특별취재반 초기의 육필원과와 취재수첩
ⓒ 황의봉
  
-1988년 제주신문 4·3 특별취재반장을 맡게 되면서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상황부터 들어볼까요.

"6월항쟁 전까지만 해도 4·3은 군사정권에 의해 철저히 왜곡되고 은폐된 금기어였습니다. 4·3을 소재로 소설이나 시 창작활동을 해도 국가보안법 죄명을 씌워 구속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6월항쟁이 나자 먼저 대학가에서 4·3 금기의 벽을 깨는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이때 관변의 이른바 공산폭동론에 대항해 민중항쟁론으로 맞불을 놓았는데, 그 열기가 신문사의 젊은 기자들에게 파급되면서 4·3 특별취재반이 출범한 것이죠."

-취재반장을 맡으면서 어떤 심경이었나요. 불안하거나 위축되지는 않았습니까.

"5공 전두환 정권의 신문사 통·폐합 정책으로 제주도에는 제주신문이 유일한 신문사였습니다. 저는 사회부장이었죠. 그런데 사회부장이 4·3 취재반장을 맡아야 한다고 하니 솔직히 겁났습니다. 도망가고 싶은데, 피할 길이 없는 겁니다. 마음을 다잡지 못하니 잠자리에서 가위눌림을 당하는 날이 계속됐고, 심지어 어느 날은 침대까지 흔들어댔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침대에서 떨어지기도 했어요.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는데 그 길로 다니던 교회로 달려가 도와달라는 절실한 기도를 드렸어요. 그날 결심을 하면서 가위눌림은 사라지더군요."

1년 여의 취재와 준비를 거쳐 1989년 4월 3일 주 2회 '4·3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연재는 57회 만에 중단된다. 연재 첫해 연말 5공세력의 지원을 받았던 경영진과 언론민주화 세력 간의 충돌이 빚어졌고, 결국 경영진이 '신문사 폐업'을 결정함에 따라 특별취재반장을 맡고 있던 그를 비롯한 110여 명의 사원이 집단해고 당하기에 이른다. 이들 해직사원들이 도민주를 모아 1990년 6월 <제민일보>를 창간, 4·3 연재는 '4·3은 말한다'로 이름을 바꿔 부활했다. 이후 제민일보에서만 456회가 연재되는 등 한국언론사에 전례없는 최장기 연재를 기록했다.

-총 513회에 걸친 4·3 연재는 금기의 벽을 깨뜨리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취재반 구성에서부터 실제 취재현장에서 부딪친 어려움에 이르기까지 첩첩산중의 난관을 극복해야 했을 것 같습니다.

"4·3 특별취재반은 16명의 기자로 구성했는데, 이것도 한국언론사에 유례가 없는 규모였습니다. 취재 자체의 범위가 방대하기도 했지만 외부압력에 대응할 수 있도록 방벽을 쌓자는 의도가 작용한 결과입니다. 나중엔 6명으로 재편했지만. 당시만 해도 4·3 취재는 매우 민감한 사항이었기 때문에 철저한 검증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사전조사, 1차 합동취재, 분석, 2차 합동취재, 증언과 문서 교차검증, 인용 때 재확인을 하는 등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조심하고 두드려보면서 헤쳐나갔습니다.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보다도 피해자나 유족들이 안고 있는 피해의식, 이른바 레드 콤플렉스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습니다.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런 침묵이 더 큰 울림으로 4·3의 잔혹사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11월부터 시작된 5·18 국회청문회가 피해자의 의식을 자극했던 것 같아요. 5·18과 비교하며 4·3의 참혹상을 증언하기 시작하더군요. 연재기간에 채록한 증언자만 6000명이 넘었습니다."
 
▲ 다랑쉬굴 현장취재 당시의 모습 1992년 4월2일 구좌읍 중산간에 있는 다랑쉬굴에서 4.3희생자 유해 11구가 발굴돼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앞쪽부터 김동만 양조훈 고대경 강홍균
ⓒ 김기삼
  
-장기 연재를 통해 엄청난 양의 기사가 게재되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기사 혹은 결정적인 증언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취재의 가속도를 붙게 한 것은 '4·28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사건'입니다. 9연대장 김익렬과 게릴라 총책 김달삼 사이의 평화협상이 극적으로 이뤄졌으나 방화사건으로 인해 깨지면서 엄청난 비극의 소용돌이로 휘말려 들어가는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경비대(군)와 경찰이 주장하는 방화범의 정체가 다르고 미군이 입체 촬영해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취재반이 우익청년단(서청과 대동청년단) 방화범을 직접 만나 방화사실을 확인했고, 미군과 경찰의 조작사실을 밝혀냈지요.

또 김익렬 연대장의 유고를 입수해 연재하면서 '미군이 초토화작전을 요구했으며, 공산폭동이라고 주장했다'는 사실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평화협상에 참여했던 9연대 정보주임 출신 이윤락 중위(이후락 전 중정부장의 사촌형)의 현장증언도 큰 도움이 되었죠. 이밖에도 4·3이 '남로당 중앙당 지령'에 의해 촉발됐다는 증언을 남긴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을 추적해 '정보부에서 고쳤다'는 새로운 증언을 이끌어낸 것도 기억에 남는 성과였고, 1992년 다랑쉬굴 유해 11구의 신원과 사건 전모를 밝힌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엔 '제주도 폭동사건은 북한공산당의 사주 아래' 일어난 것으로 기술되었죠. 교과서 필자들을 추적해 톱기사로 교과서 내용의 허구성을 보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4·3 취재반 김종민 기자의 역할이 컸습니다."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4·3 진상규명 작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지 않았습니까.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1987년 대선 때부터 4·3 문제 해결을 공약해온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면서 저희 취재반은 물론, 시민사회운동 세력 특히 제주 각계 인사들이 크게 고무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DJP연합정권이다 보니 과거사 문제가 예상보다 더디게 진행되는 겁니다. 당시 총선을 앞두고 여당 안에는 이념문제가 부각되면 불리할 수 있다며 4·3 문제에 소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사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1998년 4·3 50주년을 맞아 진실규명 촉구 집회도 하는 등 분위기를 끌어 올렸습니다. 집권당인 새정치국민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4·3특위를 구성하고 1998년 5월 7일 제주에서 첫 공청회를 했는데, 1차 공청회 주제발표를 제가 맡았고 추미애 의원이 사회를 봤지요. 추 의원은 이후 4·3특별법 대표발의를 하는 등 각별한 애정을 갖고 4·3 문제 해결에 힘을 보탰고 1999년에는 제주도로부터 명예도민증을 받기도 했습니다."

1999년 8월 23일, 양조훈이 신문사에서 해직되고 4·3 연재가 중단되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도민주로 창간한 제민일보가 경영난으로 재일동포를 새로운 경영주로 영입했는데, 이 경영주에게는 남과 북으로 갈린 가족사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안당국이 이를 빌미로 4·3 연재를 언제까지 할 것이냐는 압력을 가했고, 결국 당시 상무이사였던 양조훈은 오랜 언론인 생활의 마침표를 찍게 된 것이다. 그가 신문사를 떠났어도 4·3과의 인연은 운명처럼 이어졌다.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의 차이
 
▲ 한국기자상 수상 1993년 4.3 특별취재반이 한국기자상을 수상하고 찍은 기념사진. 오른쪽부터 양조훈 김종민 고홍철 강홍균 고대경 서재철.
ⓒ 제민일보
- 신문사를 나온 뒤에는 유족 및 시민단체가 참여한 '제주 4·3특별법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 상임공동대표로 나섰는데, 진상규명작업에서 특별법 제정으로 방향을 틀게 된 데에는 어떤 배경이 있습니까.

"세계 여러 나라의 과거사 정리과정을 비교 검토한 프리실라 헤이너가 '아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뚜렷한 차이가 있다고 했습니다. '인정하는 것'은 국가가 잘못을 확인하고 시인한다는 것이고, 인정하지 않는 '아는 것'은 진실이면서도 마치 존재하지 않는 양 취급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4·3의 실체를 인정받기 위해선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와 보고서 작성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 그 근거가 될 특별법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또 조사결과로 대통령의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이념적 누명 해소의 길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 4·3 특별법 제정 당시 마지막까지 쟁점이 됐던 것은 무엇이었나요.

"1999년 12월 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하지만, 그 여정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처음엔 20개 조문을 상정했는데, 국회 논의과정에서 팔 다리가 잘리고 몸통만 남았어요. 진상조사와 명예회복 등 달랑 11개 조문만 남고 국가추념일 지정, 재심 규정, 재단설립 등의 근거조항이 다 잘려나갔으니 유족회와 시민단체 등에서 '반쪽 특별법'이라며 당연히 반대했죠. 그럼에도 그 '허술한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유족회와 시민단체를 설득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특별취재반 당시부터 4·3 현안을 풀기 위해서는 단거리 선수가 아닌 마라토너의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해왔습니다. 특별법은 그후 4·3 희생자 범위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수형자'를 추가하는 등 개정됐어요. 결국 그 허술한 법에서 탈락한 규정들을 차근차근 모두 복원해 오늘의 4·3 위상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4·3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양조훈은 다시 진상규명 작업에 나서게 된다. 특별법에 따라 구성된 4·3위원회 수석 전문위원으로 2년 간의 진상조사와 6개월 동안의 보고서 작성 실무책임을 맡게 된 것이다. 4·3 특별취재반이 금기의 벽을 깨뜨리는 작업이었다면, 이번에는 국가 차원의 조사작업이었으니 중압감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마침내 2003년 12월 정부 차원의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왔다.1988년 제주신문의 특별취재팀 출범으로부터 따지면 15년 만의 일이었다. 한국현대사에서 특별법에 의해 작성된 최초의 정부보고서에 대해 양조훈 스스로는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4·3위원회나 진상조사기획단에 국방부, 경찰청, 보수단체 등도 참여한 갈등구조를 뚫고 이뤄낸 것이어서 더없이 소중한 결과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갈등구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데는 이념보다 인권을 중심으로 조명했던 점도 주효했다고 봅니다. 보수단체에서 '내란 은폐 보고서는 인정할 수 없다'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했지만 각하된 일도 있었습니다. 정부 차원의 진상보고서는 법률의 절차에 의해 확정된 법정보고서로 임의로 수정이 불가합니다. 또 사적 영역이 아닌 공공영역에선 이를 따라야 하는 구속력이 있지요.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과거사 규명작업의 업적 뒤집기를 노골화했지만 법정보고서여서 한 줄도 고치지 못했어요. 그 전인 2004년에는 국방부가 펴낸 '6·25 전쟁사'에서 이를 무시했다가 혼쭐이 난 끝에 35군데를 고친 수정본을 발간한 적도 있습니다. 진상조사보고서가 나온 후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사과를 이끌어낸 점도 매우 뜻깊은 일이었습니다."

- 진상조사보고서의 위상은 확고하다고 하지만 최근에도 4·3위원회에 4·3을 폄훼해온 극우 성향의 인사가 위촉됐는가 하면, 4·3 수형자 재판과정에서 사상검증 논란이 있었고, 교과서에 4·3 관련 기술 근거를 삭제한 2022 개정교육과정이 확정되는 등 4·3과 관련한 시비가 잊힐 만하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항공기 운항 중 이상기류를 만나서 기체가 불안정하게 요동치는 격입니다. 이명박 정부에선 항공기를 회항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박근혜 정부 역시 과거사에 부정적이었지만 2014년 '4·3 희생자 추념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했어요. 이런 전례를 볼 때 새로운 도전이 있을 수 있지만 단합해서 응전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아직도 '이념이 절대 가치'라고 여기는 맹목적인 집단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 워싱턴 4.3 심포지엄 2022년 12월 8일 워싱턴 윌슨센터에서 열린 '제주4.3과 인권, 한미동맹' 심포지엄에서 발언하는 양조훈 위원. 오른쪽은 캐슬린 스티븐스 전 주한미국대사.
ⓒ 제주4.3평화재단
 
- 말도 꺼내지 못했던 4·3의 진상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 진행되는 과정에까지 왔습니다. 기적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여기까지 온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보나요. 그리고 남은 과제라면 어떤 게 있을까요.

"먼저 남은 과제로는 미국의 책임문제와 4·3의 올바른 명칭을 찾아주는 정명(正名) 등 난제가 있고, 또 현재 진행중인 보상문제로 새로운 갈등을 유발해선 안 될 것입니다. 미국의 책임문제와 관련해서 2019년 뉴욕 유엔본부에서, 지난해에는 워싱턴에서 한·미 전문가들이 모인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습니다. 또 4·3 평화재단에서 미국현지 자료를 수집하기도 했고요. 한·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4·3 당시 미국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인식을 널리 확산하고, 인권적 관점에서 미국정부가 희생자 추모 등 성의있는 조치를 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습니다. 4·3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데 대해 저는 과유불급, 지나치지 않으면서 꾸준하게 한 계단 한 계단 밟아온 것이 주효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세가 더디게 보일 수도 있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기적같은 일을 성취할 수 있었던 원동력 아닐까 합니다."

제주사람 양조훈이 걸어온 4·3 이야기는 3시간이 지났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4·3과 관련해 < 4·3은 말한다>(공저)를 비롯해 많은 책도 발간했고, 한국기자상(특별취재반) 송하언론상 제주문화상 아시아태평양조정포럼(APMF) 평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도 누렸다. 마지막으로 요즘의 심경과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봤다.

"4·3 진실찾기 작업이 모두에게 박수만 받는 일은 아니었어요. 때로는 모멸감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기도를 하죠. 돌이켜봐도 4·3은 제가 선택했다기보다는 운명처럼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4·3 75주년이 바로 제 나이이기도 하지요. 이젠 후배들에게 맡기고 뒤에서 도와주고 격려해주는 역할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작가 현기영은 양조훈의 저서 < 4·3, 그 진실을 찾아서>가 발간되었을 때 "양조훈은 온갖 협박과 비난, 방해의 완강한 벽을 뚫고 4·3 진상규명의 대의에 일생의 절반을 바쳐 헌걸차게(당당하게) 살아온 이름"이라고 했다. 잘 어울리는 헌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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