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도자기 파편 메워준 금색 도금, 독자적 춤사위 됐다
속정 깊어 보이는 갈색 오지항아리, 선비의 감상품이 된 흰 달항아리, 왕을 상징하는 용무늬가 그려진 철화백자와 청화백자, 학이 유유히 날아가는 푸른 청자, 투박하고 심플한 분청사기…. 다 성격은 다르지만 시뻘건 불길을 견디며 세상에 나왔으나 도자기로서는 완성품 가치가 없다며 장인에 의해 깨지고 부셔져 파편이 된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된 버림받았던 운명이 새로운 목숨이 됐다. 퍼즐처럼 파편은 맞춰졌지만 원래 속했던 몸체대로 붙여진 것이 아니다. 도자기로서는 실패했으나 예술품으로 재탄생한 기막힌 ‘도자기 인생 2막’이다. 게다가 경계를 넘어선 융합이라는 21세기적 가치를 상징하는 리바이어던처럼 용틀임하는 유기체가 됐다. 어떤 실패도 화려한 반전이 있을 수 있다고 선언하듯 작가는 지탱하기 힘들어보이는 5m 높이까지 아슬아슬 이어 붙여 쌓아올린 도자기 파편 작품에 ‘이상한 나라의 아홉 용’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2017년 베니스비엔날레에 초청받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이 작품을 “한국에서 꼭 보여주고 싶었다”며 이수경(59) 작가는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작가의 개인전 ‘이상한 나라의 아홉 용’(이하 아홉 용)이 열리고 있는 서울 성동구 성수동 더페이지갤러리에서 지난 세밑 작가를 만났다.
“북한 회령 지역의 흑유, 해주 백자, 남한의 경상도 문경 백자, 전남 강진 청자, 경기 여주와 이천의 백자…. 아휴, 북한서 흘러나오는 도자기를 구하러 중국 단둥까지 갔다니까요. 더는 그런 짓 못할 거 같아요.”
‘한반도의 모든 도자기 파편의 집대성’이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열정 넘쳤던 그 시기를 회상하는 작가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이수경은 이 작품 ‘아홉용’이 대표하듯 금 간 도자기를 금(金)으로 이어붙인 ‘번역된 도자기’ 연작으로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작가가 됐다. 이번 개인전은 그 처음과 현재까지의 변주를 보여주는 중간 회고전 성격을 갖는다.
서양화를 전공한 그가 조각과 출신이나 할 것 같은 이 설치 작업을 시작한 계기는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이탈리아 밀라노 인근 알비솔라에서 하는 알비솔라도자비엔날레에 초대 받았다. 개념미술을 하던 시기였다. 감독의 주문대로 현지 도자기 장인들과 협업을 하며 조선백자를 재현하는 작업을 했다. 조선백자를 아는 우리 눈에는 생뚱맞아 보이는 그 결과물은 이탈리아 장인들이 생각하는 조선 도자에 대한 ‘번역’이었다.
운명의 여신이 작가를 향해 처음 미소를 지은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우연히 경기도 이천 도자기 공방에 갈 일이 있었다. 도공들이 실패작이라고 깨서 버린 도자기 파편이 눈에 들어왔다. 산산이 깨졌지만, 깨진 상태라 파편에 그려진 문양들이 더 도드라지며 아름답게 와 박혔다. 그걸 가방에 잔뜩 얻어왔다. 어디 쓸지도 모른채.
어느 날 친구와 전화를 하다 손장난하듯 파편을 만지작거리며 이리저리 붙였는데, 놀랍게도 퍼즐처럼 상관없는 것들이 짝이 맞는 게 아닌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이거다, 이거 재밌겠다’싶었다. ‘금이 간 거니까. 금(金)으로 이어붙이면 어떨까’하는 언어적 유희도 생각했다. 그렇게 이어 붙인 파편 작업으로 2002년 김홍희 관장이 운영하던 대안공간 쌈지스페이스에서 ‘번역된 도자기’ 첫 전시를 했다. 반응은 시큰둥했다. 묻힐 거 같은 이 작업은 김 관장이 2006년 감독을 맡은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받으면서 운명의 날개를 달았다. ‘전통의 현대적 해석’이라고 해외 언론에서 호평을 했다. 국내 미술계 인식도 달라졌다.
그 작품을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로는 이들도 등장했다. 그렇다. 2006년 그에겐 여성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개인적 상처가 있었던 것이다. 삶이 산산이 부서졌다. “살기 위해서 부서진 몸과 마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작업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했다.
그런데 이 작업은 페미니즘을 넘어 휴머니즘으로서의 보편성이 있다. 누구에게나 삶이 파편처럼 조각조각 나는 순간이 있지 않나. 그 상처가 고귀한 금으로 접착되는 것은 일종의 판타지다. 그 판타지가 주는 위로가 국적을 초월해 세계적 공감대를 얻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번역된 도자기는 작가가 ‘에고’를 놓았을 때 자신 앞에 출현한 예술이기도 했다. “처음에 원하는 형태로 만들어 내려고 하다가 많은 좌절을 겪었다”는 작가는 오히려 마음을 비우고 매순간에 집중하면서 예상치도 못했던 형태가 만들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만들어지는 유기체다.
“그저 다음, 다음으로 온몸의 세포를 긴장시키며 외줄 타듯 작업합니다. 아이처럼 몰입하며 작업할 때 얻는 행복감에 중독이 된 거 같아요.”
한 때 다른 몸체에 속했던 파편과 파편이 만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새로운 유기체가 되는 과정은 그렇게 우연성의 효과가 있다. 외줄 타듯 위로 쌓여가면서도 균형을 유지하는 긴장감과 조형성에 그는 예술가로서의 희열을 느꼈다.
자기 치유를 넘어선 희열, 그 때문일까. 처음 이수경의 작업에서 금은 파편과 파편을 이어주는 접착제 기능을 했다. 그러던 것이 접착제 역할을 넘어서 그 자체가 독자적인 예술적 요소가 되기 시작했다. 그런 변화는 2010년부터 일어났다. 일률적인 굵기로 메워지던 금이 기능적인 역할을 벗어나자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서체처럼, 춤사위처럼. 굵어졌다 가늘어졌다, 흐르다 멈추기도 했다. 용암처럼 솟구치기도 했다. 미술에서 회화의 구성 요소인 선과 색이 표현주의에 와서 자율성을 갖고 선과 색 그 자체가 사람의 심리를 표출하는 요소가 된 것처럼 말이다. 이 작업을 위해 작가는 일부러 서예와 전통춤을 배웠다.
그러니 그에게서 금을 메우는 행위는 이제 회화적 행위다. 연어가 거슬러 올라가듯 작가로서의 출발인 서양화로의 회귀다. 그리고 진짜 캔버스에 그린 회화 신작들도 시작됐다.
“회화가 갑작스러운 건 아니에요. 2010년대 초반부터 매일 일기를 쓰듯 드로잉을 했습니다. 심리 치유 과정에서 일종의 일기처럼 매일 그림을 그렸습니다. 지금도 그걸 보면 그때의 마음상태가 떠오릅니다.”
회화의 소재가 장미라서 놀랐다. 스케일 큰 도자기 작업을 하던 작가가 ‘웬 꽃 그림이냐’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장미라는 소재 역시 심리 치유의 과정에서 나왔다. 2014년 작가는 최면을 통해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도를 했다. 그때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미끄러지는 경계에서 장미가 미치도록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곳을 지나가는 자신을 봤다. 장미는 현실의 꽃이 아니라 실제와 상상 사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막처럼 있는 곳에 피어 있던 것이다.
그러니 장미는 희열의 도상학이다. 번역된 도자기에서 금이 하는 역할과 마찬가지다. 금이 파편과 파편을 붙여주는 접착제의 기능을 넘어 그 자체로 분출하는 기쁨이 된 것처럼 말이다.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순간에 다가오는 기쁨, 세상의 어떤 것과 바꿀 수 없는 환희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작업을 합니다.”
만약 당신에게 지난 한해가 파편처럼 조각났고 그걸 이어 붙이고 싶고, 또 그걸 뛰어넘어 새로운 역사를 만들고 싶다면 이수경이 일궈온 희열의 예술을 권하고 싶다. 새해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아주 좋은 선물이다. 전시는 2월 10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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