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 연봉 버리고 열정 선택... 4천억대 사업가 된 남자 [윤한샘의 맥주실록]

윤한샘 2023. 1. 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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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한샘의 맥주실록] 미국 건국 정신 담은, 새뮤얼 애덤스 보스턴 라거

[윤한샘 기자]

 보스턴 차사건
ⓒ 위키피디아
"만약 당신이 자유보다 부를 사랑한다면 그리고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는 것보다 노예 상태의 안온을 사랑한다면 조용히 우리를 떠나시오. 그저 무릎 꿇고 먹이를 주는 손이나 핥고 있으세요. 쇠사슬에 묶여 그렇게 살길 바랍니다."

1773년 5월, 인디언 분장을 한 60명의 남자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해있는 세 척의 배로 오른다. 기습적으로 배를 점거한 이들은 갑판에 있던 상자들을 밖으로 던지기 시작했고 항구는 곧 검붉은 물질로 뒤덮였다. '자유의 아들' 소속으로 밝혀진 무리가 바다에 버린 것은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수입한 홍차 342상자였다. 지금 가치로 무려 20억 원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보스턴 차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태는 영국 의회가 동인도회사의 '차 독점권'을 승인하는 '차세법'(tea act)을 통과시키면서 발생했다. 차세법은 파산 위기의 동인도회사를 돕기 위해 아메리카 식민지로 수출하는 차에 대한 독점적 지위를 부여한 법이었다. 당연히 식민지인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차 무역을 하던 사업가는 물론 영국의 일방통행을 반대하던 정치인들도 목소리를 냈다. 보스턴 차사건은 응축된 저항의 기운을 폭발시킨 기폭제였다. 

영국 정부는 곧바로 '탄압법'을 제정해 식민지 매사추세츠에 대한 응징을 시작했다. '탄압법'은 매사추세츠의 자치권을 제한하는 법이었다. 국왕이 직접 식민지 상원의원과 공무원을 임명했고 총독의 권한을 강화했으며 정치 미팅을 제한했다. 영국 군인의 주둔을 위해 식량과 재산을 마음대로 징발할 수도 있었다. 

식민지민들은 더 조직적이고 격렬하게 저항했고 마침내 1774년 9월, 55명의 식민지 대표들이 필라델피아에 모여 영국 정부에 대응을 논의하는 제1차 대륙회의가 열렸다. 미국 독립의 신호탄이 터진 것이다. 이 모든 이벤트의 뒤에는 새뮤얼 애덤스라는 인물이 있었다. 

미국 혁명의 아버지, 새뮤얼 애덤스
 
 새뮤얼 애덤스
ⓒ 위키피디아
새뮤얼 애덤스는 미국 독립을 이끈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된다. 1722년 매사추세츠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는 타고난 정치가였다. 맥아 공장을 운영하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지만 사업보다 정치에 재능이 있었다. 특히 하버드대 재학 당시 국가권력을 법으로 제한하고 개인의 자유와 천부적 권리를 주장하는 존 로크의 사상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 졸업 후, 가업이었던 맥주 맥아 공장을 이어받았지만 파산으로 정리한 후 본격적인 정치가의 길을 걷는다. 

1765년 꾸준히 영국 정부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던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리는 일이 발생한다. 1756년부터 유럽과 아메리카에서 7년 전쟁을 치른 영국이 세수를 채우기 위해 설탕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설탕법은 아메리카 식민지로 들어오는 설탕, 와인, 커피 등에 관세를 부과하는 법이었다. 전쟁 후 마찬가지로 불황을 겪고 있던 식민지인들은 이 법이 가혹하다고 여겼고 즉각 반발했다. 하지만 오히려 영국 의회는 인지세법과 타운센트법을 잇달아 의결하며 식민지인들을 압박했다. 

1765년 통과된 인지세법은 식민지에서 발행되는 모든 인쇄물에 인지를 붙여 그 수익을 본토가 가져간다는 법이었고 1767년 제정된 타운센트법은 차(tea), 납, 유리, 페인트 같은 공산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법이었다. 식민지인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표자 없는 곳에 세금 없다'라는 이론을 근거로 영국상품수입금지협회를 만들어 불매운동을 전개했고 시위대까지 조직해 물리적으로 저항했다.  

새뮤얼 애덤스는 이런 모든 저항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시위대 '자유의 아들'을 이끌며 인지세법과 타운센트법 철폐를 위한 운동과 시위를 펼쳤고 보스턴은 새뮤얼 애덤스의 활동과 함께 저항의 핵심지가 되었다. 결국 영국 정부는 인지세법과 타운센트법을 철폐했지만 저항의 대가는 무거웠다. 1770년 영국 군대는 보스턴을 점령하고 주민은 물론 의회를 감시했고 영국에 대한 적개심이 임계점에 달한 1773년, 결국 보스턴 차사건이 일어났다. 

보스턴 차사건 이후 제정된 탄압법은 영국이 식민지의 자유와 재산을 몰수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새뮤얼 애덤스는 식민지 정보 교환을 위해 조직된 통신위원회를 통해 영국에 저항하는 모임을 주도했다. 필라델피아에서 1차 대륙회의에 모인 식민지 대표들은 공안위원회를 만들어 조직적인 저항을 했다. 영국의 인내심도 한계에 달했다. 1775년 4월 9일 새벽, 마침내 영국군과 아메리카 민병대 사이에 첫 총소리가 울렸다. 미국 독립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곧이어 열린 2차 대륙회의에서는 조지 워싱턴을 수장으로 하는 대륙군이 창설되었다. 1776년 7월 4일에는 새뮤얼 애덤스를 포함한 12명의 대표가 독립선언서에 서명하며 미국의 독립을 공표했다. 전쟁은 화력이 우세한 영국군이 쉽게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지속됐다. 대륙군은 끈질기게 버티고 버텼다. 이후 영국과 적대관계였던 프랑스가 개입하며 군수물자를 지원했고 결국 1781년 대륙군이 승리하며 미국은 주권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새뮤얼 애덤스는 독립 전쟁은 물론 미국 헌법 제정에 많은 기여를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화주의는 익숙한 체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초기 미국 정부의 틀을 잡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설득과 노력이 필요했다. 헌법에 기초한 공화정이 완성되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주지사를 역임하고 1803년 10월 81세의 나이로 흙으로 돌아갔다. 

보스턴,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또 다른 발상지
 
 보스턴 비어 컴퍼니 짐 코흐
ⓒ 보스턴비어컴퍼니
1984년 보스턴, 누군가 부엌에서 맥주 양조에 골몰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손으로 쓴 빛바랜 레시피가 놓여있었다.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보스턴 컨설팅 컴퍼니에 다니던 34살의 전도유망한 청년은 커리어를 포기하고 맥주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한다. 화려한 현재를 버리고 불투명한 미래를 선택한 이 남자의 이름은 짐 코흐였다. 

짐 코흐가 맥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독일계 이민자였던 증조부부터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양조자 집안이었다. 그런데도 아들이 당시 연봉 25만 달러를 포기하고 맥주 양조장을 한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미친 짓'이라고 했다. 양조사 출신인 그는 소규모 양조장이 사업적으로 얼마나 위험하고 도전적인 일인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짐 코흐는 돈보다 가슴이 원하는 길을 따랐다. 그의 꿈은 작지만 가치 있는 맥주를 세상에 내놓는 일이었다. 당시 미국은 소규모 양조장이 겨우 12개에 불과한 불모지였지만 맥주에 대한 열정을 포기할 수 없었다. 첫 맥주에 대한 고민은 크지 않았다. 짐 코흐는 다락에 보관되어 있던 증조부 루이스 코흐가 남긴 레시피를 바탕으로 맥주를 디자인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버드와이저와 다르고 밀러와 구분되는 가치, 바로 짐 코흐 맥주만이 가져야 할 정체성이었다.  

짐 코흐는 그 해답을 보스턴에서 찾았다. 미국 독립의 발화점이자 건국의 아버지 새뮤얼 애덤스의 흔적이 남아있는 보스턴은 크래프트 맥주만의 스토리를 녹여낼 수 있는 대상이었다. 더구나 하버드대를 졸업하고 맥아 사업을 운영했던 새뮤얼 애덤스는 맥주 혁명을 준비하고 있던 20세기 짐 코흐와 다름없었다.

1985년 보스턴 비어 컴퍼니는 애국일(Patriots' Day)에 맞춰 첫 맥주를 출시한다. 라벨에는 맥주잔을 들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새뮤얼 애덤스의 모습과 '새뮤얼 애덤스 보스턴 라거'라는 폰트가 뚜렷하게 박혀있었다.

증조부 레시피에 따라 만든 이 맥주 스타일은 비엔나 라거였다. 비엔나 라거는 19세기 중반 안톤 드레허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시작한 맥주로 5~5.5% 알코올, 투명한 앰버색, 옅은 캐러멜, 뭉근한 바디감이 매력인 라거 맥주다. 그러나 비엔나 라거는 황금색 라거 열풍에 밀려 20세기에 거의 멸종되다시피 했다. 
 
 새뮤얼 애덤스 보스턴 라거
ⓒ 보스턴비어컴퍼니
짐 코흐는 비엔나 라거를 부활시키며 보스턴 라거를 완성했다. 5%의 알코올과 아름다운 앰버색을 담고 있는 새뮤얼 애덤스 보스턴 라거는 우아하다. 과하지 않은 단맛은 섬세한 쓴맛과 만나 좋은 균형감을 이루고 옅은 캐러멜과 견과류 향은 매끈한 바디감과 함께 복합적인 풍미를 발산한다. 

사업 초기만 해도 짐 코흐는 일일이 펍을 방문하며 맥주를 판매했다. 당시 흔하게 볼 수 없는 앰버색 라거도 주목을 끌었지만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가진 건, 라벨 속 새뮤얼 애덤스였다. 맥주잔을 들고 있는 미국 건국 아버지의 모습은 친근함과 자부심을 전달했다. 사람들은 맥주가 아닌 미국의 정신과 보스턴의 역사를 마신 것이다. 

새뮤얼 애덤스는 출시된 지 1년 만에 전미맥주대회(Great America Beer Festival)에서 수상하며 신데렐라로 떠오른다. 보스턴 비어 컴퍼니의 성장세는 놀라웠다. 1990년에는 2000만 달러, 약 250억 원의 매출을 달성하며 짐 코흐가 세운 목표를 훌쩍 뛰어넘었고 1995년에는 뉴욕 증권거래소 상장에도 성공했다. 2009년에는 4000억 원이 넘는 규모로 성장했다. 

이런 새뮤얼 애덤스의 성공은 198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된 또 다른 전설 시에라 네바다와 곧잘 비교되곤 한다. 두 회사는 미국 크래프트 맥주의 심장으로 산업을 이끌었지만 추구하는 가치는 조금 달랐다. 시에라 네바다가 미국 홉을 통해 자유롭고 실험적인 맥주로 크래프트 맥주 혁명을 이끌었다면 새뮤얼 애덤스는 정체성과 로컬문화를 통해 크래프트 맥주 정신을 실현했다.

"행복과 부자 중 후자를 선택하면 당신은 소시오패스일 지도 모릅니다. 저는 소시오패스가 아니었습니다. 행복을 선택했거든요. 당신을 부자로 만드는 것이 아닌 행복하게 하는 것을 선택하십시오." 누군가는 이런 짐 코흐의 철학을 낭만적이라고 치부하겠지만 수억의 연봉을 마다하고 열정을 선택한 그를 감히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온한 길을 박차고 가슴이 원하는 일을 한 짐 코흐, 어쩌면 그는 크래프트 맥주 혁명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환생한 새뮤얼 애덤스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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